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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1.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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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와 사랑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위한 구호를 정당화하는 일에 소비될 뿐이다. 기독교에 큰 기대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로 사회를 분열하고,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일들을 주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석하게 성경을 믿는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성경 자체가 너무 두껍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더구나 서로 상이한 시기와 장소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기본 정서를 가진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을 믿는다는 이 말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다양한 만큼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이 그리도 어려운 이야기인가. 성경은 언제나 해석의 문제에 부딪히고, 해석은 언제나 해석자의 상황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그 단순한 이야기조차 기독교인들과는 서로 공유될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리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서는가. 미국의 대선이 마치 우리나라의 선거인 양, 기를 쓰고 부정선거를 외치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도대체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나에게 매우 유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일탈에 어떤 심각한 이론들을 들이대며 고민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가 보기에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반-상식, 반-사회적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보다는 그 이전에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지금의 극우 개신교인들에게 천벌이 있어야 마땅하다. 언제나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의 무지는 알지 못한 채, 미천한 사유로 타인을 가르치려 드는, 그것도 자신들이 그 위대한 진리를 알고 있다며 선전하는 그 태도. 정의로운 신이 살아있다면 분명 그들의 행동에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들의 행동을 더는 두고 보지 않고 일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확신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집단적 무지와 욕심으로 똘똘 뭉친 그 집단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내하시고, 또 언제나 참으신다. 교회를 향한 사회적 분노는 커져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온화하시다.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온갖 선동질을 해대는 기독교인들의 기고만장함도 참으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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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사랑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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