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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9.1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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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아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아들아! 힘을 내거라. 머지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시금 길을 갔다. 이게 웬일인가? 사막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자 아들은 절망 가운데 주저앉았다. “보세요, 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가다가 죽은 거예요. 가다 죽으나 여기서 앉아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아들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란다. 힘을 내거라”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막의 무덤’과 같은 혹독한 시련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의 무덤’ 가운데서 아버지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 절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무덤’을 만날 때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절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할 때가 있다.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가운데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절망을 하는 것일까?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은 무수한 끝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시기 전 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의 끝은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린도후서 1장 8~9절)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이런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 왜 이런 절망을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무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 앞에 절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절망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다.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었다면 그 무능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출발한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출발이 희망의 시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 희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절망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 시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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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시작이다 - 고린도후서 1장 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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