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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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 [19] 그리스도인의 영성-부활(새창조)의 영성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살전4:14) 사실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복음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딤후2:8)를 그리스도인이라한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부활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아담 이후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천국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부활 이전의 세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탄의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세계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 아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창조 안에는 죽음이 사라졌다.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 부활이 가져온 것은 옛 창조를 끝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마주하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이 죽었다는 계시를 받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서 죽은 자신을 장사지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세례(침례)를 통해 시인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 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함으로 그의 부활과 연합되는 길로 나아간다.(롬6:5) 하나님은 십자가로 옛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제거하셨다.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것을 의지하여 살게 하셨다. 이것은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음이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한량없이 주신다는 복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로 우리를 제거하시고 부활로 인해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셨다. 부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육의 성분으로 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영적 기능을 가지고 새로운 왕국인 새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부활 생명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신다./대전반석교회 목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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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11)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부탁한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를 욥처럼 건포도 되게 하시어 순교하기까지 감사·찬송하게 하신다.   2:7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신부 성도가 아닌 육적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부 성도가 사랑하는 이를 노루와 들 사슴으로 비유하고 있다. 노루와 들 사슴 같은 주님이 원하기까지는 절대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루와 사슴의 특징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도망가고 만다. 주님이 노루와 들 사슴 같으시니, 그분이 지금 나를 껴안아서 하나로 결합 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언제까지 신부 성도와 이 같은 한 몸 된 상태를 원하실까? 주님이 내게 들어오셔서 주님의 진리의 사랑을 깨우쳐 나의 아구까지 채우시되 내가 진리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기까지 원하신다. 여기서 왜 주님을 노루나 들 사슴으로 비유하였나? 이는 그들의 특성인 굽이 갈라진 것, 약초만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즉 노루와 사슴이 굽이 갈라진 것은 레위기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룩한 것에 속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 노루가 땅을 밟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다. 노루는 약초만 먹고 자라서 몸 전체가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를 살리는 영이 되신다.  또 맑은 물만 마시는 노루와 같이 주님은 진리의 생수가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주셨다. 그의 피를 힘입은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속하여 일곱 영까지 충만케 부어주신다.   2:8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여! 보라, 그가 산들 위로 뛰며 작은 산들 위로 가볍게 뛰며 오는 도다.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이다. 주님의 음성은 육신의 귀에 들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령에 세미하게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는데, 다른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는 자는 그 사람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지 의심이 된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이 들리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알게 하신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성령이 깨우쳐 주신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몇 마디의 말씀만을 일일이 깨우쳐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격자이신 주님이 인격자인 내게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모든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대화하듯 말이다. 첫 번째로 깨우쳐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려주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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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자
    배에스더목사 (마르페선교 센터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터널을 지나간 뜻하여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터널과 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왜 이리도 잘 안 풀릴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돕고 계시는 것이 맞을까’를 생각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가 믿음의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사역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질병에서 나아지길 위해 늘 간구한다. 나 또한 그랬었기에 백번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질병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언급하셨다.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꽃길만 걸으며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꽃길이란 역경과 고난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질병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연연해 있지 않고 진정한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이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감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가 오히려 모든것에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감사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 형태의 중독의 문제로 만날 때가 있다. 사실 중독을 끊어 내기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가 없다.    중독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기독교인이면서 중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수많은 죄책감과 함께 자기 비하에 이르게 되므로 많이 위험하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먹어 보기도 하고 입원치료도 받지만 여전히 이들은 또 다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의 치유.......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지만 반드시 치유될 수 있다. 이들이 잊은 것이 있다. 감사이다. 허덕임의 중독 속에 감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내가 주도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감사는 모든 중독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감사하기를 시작해 보라 놀라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듭 나는 날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모든 질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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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에레모스 영성7] 광야를 길 삼아
    산 좋고 물 좋고 풍치 좋은 자연 환경, 광야에는 그렇게 즐길만한 것들이 없다. 또한 광야를 간다 하더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넓은 길은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위해 생겨났거나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마찻길이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의 품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는 그러한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넓은 길은 다 놔두고 길도 아닌 광야 길을 걷도록 하였다. 홍해를 길로 만들어 걷도록 하신 하나님은 그 다음은 광야를 길로 삼아 걷도록 하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약속의 땅, 가나안 까지 열하루면 되는 지름길을 놔두고 40년의 세월 동안 광야를 걸어야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은 어떤 의미일까? 모세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 5:1)는 말씀을 전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조상의 이러한 광야 체험을 대를 이어 간직하고 기억하였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명 8:2)는 말씀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운 뒤에도 줄곧 되뇌어지면서 마음 한복판에 새겨졌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순례자의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걸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홍해도 길이 되고 광야도 길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점에서 광야는 길 그 자체가 아닐까. 광야 어느 한 쪽으로 길을 내지 않더라도 그 모두를 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도 구름 기둥으로 또 불 기둥으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미 광야로 내 보내진 존재이니까.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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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석대 이사장 박요일목사
    백석대 이사장인 박요일목사는 말씀과 기도중심의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지난 세월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고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했다.   박목사는 고려대 법대 졸업후 총무처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으로 5년간 일하다가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다. 또한 성결대, 백석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강성교회를 설립하여 41년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6년간 백석총회 유지재단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197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출발한 강성교회는 1996년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07년 유지재단을 세웠다. 유지재단은 영안교회와 흰돌교회, 그리고 강성교회가 함께 세웠고, 박목사는 초대 이사장부터 다섯 번 연임하며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박목사의 설교에는 한결같은 원칙이자 철칙이 하나 있다. 설교주제를 목사의 재량으로 정하지 않고, 성경에 쓰여진 순서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목회철학이다. 강성교회는 매 주일 새벽 5시 30분 예배, 그리고 오전 9시와 11시 예배, 오후 찬양예배가 있다. 예를 들어, 성경본문 1~5절을 새벽에 전하고, 6~10절은 오전예배때 전하고, 11~15절을 오후에 전하는 방식이다. 매 주보에는 그날 설교문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요예배 설교는 지난 주일예배 설교를 복습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주중에 교인들은 주보에 쓰인 지난 설교문을 읽고, 한주간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권면한다. 또한 구역예배 인도자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문을 보내주어 말씀을 예습하도록 한다.   이 원칙을 지난 40여년간 한결같이 지켜왔다. 그동안 설교가 생뚱맞거나 엉뚱한 주제가 아닌, 때마다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고 박목사는 고백한다.   박목사는 “하나님은 고정된 말씀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오래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전할 때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힘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목사의 설교준비는 마치 ‘어머니가 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100% 무공해는 어렵지만, 저공해로 영양가 있는 밥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목사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목사는 “세상의 법은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3심 재판제도를 둔다. 설령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사면복권이나 재심의 기회가 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번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잘못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평소에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를 향해 말씀중심으로 가야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목회자가 깨어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말씀중심으로 가야 한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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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 [정론] 예수부활의 현대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확실성을 가진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한 생명 회복도 아니요, 윤회도 아니요, 환상적인 영적 부활도 아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과 뼈가 다시 살아난 육신의 부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절대적 필연성을 가진 사건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거짓이 되고,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성도들은 불쌍한 자 중에 더욱 불쌍한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타심을 가진 진정존재가 이기심을 가진 비진정존재를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적어도 네 가지의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부활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이 승리하신 사건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예수님만 죽이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여 세상의 정치권력, 종교권력 모두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다시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리가 확정되었다.   둘째로, 부활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에서 진리가 승리한 사건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비진리가 진리를 죽이려 했지만, 진리는 다시 살아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비진리를 따르는 자는 사망의 길을 가는 것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명은 영원히 사는 영생이다.   셋째로, 부활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에서 사랑이 승리한 사건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미움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부활 사건은, 미움의 사역은 실패할 것이요, 사랑의 사역은 승리함을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보여주는 빛이다.   넷째로, 부활은 생명과 사망의 싸움에서 생명이 이긴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사망은 인류의 마지막 원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 아래 거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 소망을 건네주신 것이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한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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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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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모스 영성1] 광야의 의미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에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한 일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일이었다. 광야는 ‘에레모스’(έρημοϛ) 라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서 황량한 곳,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사막이나 빈들, 한적한 곳 또는 외진 곳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그런 유대광야에서 40일의 금식 기도를 하시면서 사탄의 시험을 견뎌야 했다. 그 시험은 돌들을 빵으로 만들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거나, 세상의 권력을 한 손에 쥘 수 있는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예수는 말씀으로 이 유혹을 잘 물리치셨고 나중에는 천사들로부터 시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광야는 이름 그대로 척박한 곳이다. 마을이나 도시로 발달하기 좋은 강이나 샘이 풍성한 곳이 아니다. 농사나 목축에 적합한 땅이 아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하여 버려진 땅이다. 광야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같은 문명권이 아니며 요르단 강이나 갈릴리 호수 같이 사람 살만한 지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을 찾을 까닭이 없는 외면이나 거부의 땅이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 광야로 사람을 이끄신다. 그리고 그 땅으로 발을 내딛는 이에게 하늘의 말씀을 내리신다. 예수께서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야는 물적 풍요로움 대신에 영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곳이다. 일반적 거처인 밭이나 들판이나 마을을 뜻하는 ‘아그로스’(άγρός)와 대조되는 에레모스, 그곳에서 영성가들은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유혹과 천사의 시중을 더욱 진하게 체험 했다./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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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30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5) 우리가 너를 위해 금 사슬을 만들리
      성도가 영광돌리며 열매 맺으면 주님이 기쁘게 드시는 음식     여자들, 즉 모든 신자들 가운데서 가장 어여쁜 자는 신부성도를 말한다. 1:11우리가 너를 위하여 은 장식이 있는 금 사슬을 만들리라. '우리가'는 성부·성자·성령 세 분 하나님을, '너'는 신부를 가리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부성도를 위하여 은장식이 있는 금사슬을 만들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은'은 거룩하고 깨끗함을 상징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금사슬'은 창41장 42절에 파라오가 요셉을 애굽 총리로 세우면서 목에 금 사슬을 걸어준 것과 같다. 파라오의 금사슬은 파라오의 영광을 상징하며, 그 영광을 요셉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두신 하늘 영광의 유업이 있다(벧전1:4). 하나님 자녀들이 그 영광을 상속받아서 영원토록 누리며 행복할 수 있게 '우리'(삼위일체 하나님)가 같이 깨끗하게 계속 구원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성자 예수님은 친히 자기 몸을 희생하여 피흘려 죄를 사해주셨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가 이뤄 놓으신 구원의 일들을 믿게 하시며 성부 하나님은 영광을 예비하시고 상속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를 은과 같이 깨끗한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구원해 주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금 사슬을 상속받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1:12 왕이 그의 상에 앉아 계실 때 나의 감송나무가 그 향기를 풍기는도다.‘왕’은 11절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 영광의 주님을 가리키며 왕이 그의 상에 앉아 있는 것은 주님이 음식을 드시는 것을 말한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성도가 주님께 영광돌리며 열매 맺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쁘게 드시는 음식이 된다. 주님이 상에 앉아 음식을 드실 때 나의 감송나무가 향기를 발한다고 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면 감송나무가 향기를 풍기는 것이된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찬송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옥합을 깨뜨려 나드향을 부어드리는 것과 같다(요 12:3). 그녀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귀한 나드향과 같고 그 사랑을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인해 주님께 영광과 찬송 드리는 것이 옥합을 깨뜨려 나드향을 주님 발 앞에 되돌려 부어드리는 것이다.   1:13 나의 참 사랑하는 자는 내게는 몰약 다발이니, 그가 온 밤을 내 가슴 사이에 누우리라. '나의 참 사랑하는 자'는 12절의 왕, 곧 영광의 주님을 말한다. 몰약은 장례관례 때 사용하는 향료인데(요 19:39~40) 썩지 않게 하는 향료이다. 몰약 다발' 은 몰약향이 담긴 작은 주머니로 향수를 대신하여 신부 성도의 가슴 사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 몰약향이 되는 것은 주님이 내게 썩지 않는 향이 되는 것을 말씀한다. 주님이 자기 몸을 깨뜨려 희생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내가 받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의 몰약 주머니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내게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계속되는 사랑이 '그가 온 밤을 내 가슴 사이에 누우리라' 이다. 온 밤은 내가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때를 가리킨다. 또 전 인류적으로 온 밤이 되는 때는 바로 7년 대환란의 때이다. 그 때에 주님은 내게 몰약 다발이 되어서 내 가슴 사이에 누우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내게 썩지 않는 몰약향과 같이 없어지지 않고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내 가슴 사이에 끝까지 변함없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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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1-30
  • 성서와 생활[13] 그리스도인의 영성-정직의 영성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신6:18 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능한 길이다. 정직의 대로(大路)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이다.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신6:19 그리스도인의 축복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임을 아는 것이 정직한 삶이다.    정직한 영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길을 가게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신13:18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살아 역사하신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신14:1, 하나님 자녀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성민으로서 정직한 길을 원하신다.     가증한 것도 먹을 수 없으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아는 삶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는 삶, 신14:23 거룩한 헌신을 위한 구별된 사람을 잊지 않는 존중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돌아보는 정직한 마음을 알게 하신다. 정직은 하나님 자녀의 ‘온전한 마음’ 대하25:2 으로 악에서 떠나게 한다. 가장 정직한 삶을 살아온 대표적인 사람인 욥을 통해 보여주셨다. 욥1:8 정직한 자 만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으며 시32:22 정직한 자만 이 찬송할 수 있다.시33:1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함으로 시33:4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만이 선한 길을 깨닫게 될 것이다.잠2:9 정직한 사람들은 악을 떠나며 그가 말할 때 마다 하나님을 유쾌하게 하는 자들이다. 잠22:16 사람들 가운데는 정직한 자가 없으며 미7:2 정직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정직한 영은 온 영과 혼과 몸을 온전케살전5:3 보전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다. 보지 못한 것을 믿음으로 말할 수 있고 오지 않은 주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정직한 자들의 길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그의 하실 일을 기다리며 그의 약속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의 정직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어둠을 이길 수 없다.   그의 정직한 도와호14:9 율례들을 믿음으로 악을 물리치고 주님의 승리를 체험하게 하신다. 주님은 말씀으로 정직한 영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보이셨다. 주님의 계시가 없다면 우리의 정직은 없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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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1-30
  • [정론]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신앙과 직제위원회(Faith and Order Commission)가 페루 리마에서 발표한 리마문서(Lima Document)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가시적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문서는 전 세계 수많은 교회들이 세례와 성찬과 사역에 대해 수십 년간 이어 온 연구와 대화의 결과이며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공통 분모를 확인하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교회들이 리마문서에 대해 각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처한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자신의 공동체가 부족했던 부분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한 이들이 다수였지만 이 문서의 신학적 생경함과 모호함을 토로한 교회도 있었다. 심지어 내용에 대한 찬반(贊反) 사이의 첨예한 대립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다채로운 견해들을 마주하며 세계의 교회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다양성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연합과 일치를 위해 심은 씨앗이 다양성의 발현이라는 예기치 않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자연스럽게 세례와 성찬과 사역에 대한 논의가 이전보다 훨씬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었다. 물론 교회의 연합과 일치로 향하는 길에 여전히 장애물은 있지만 진정한 연합과 일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갈등의 요소가 아니라 성찰과 성숙의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연합과 일치를 절대적인 기준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연합과 일치는 인위적인 획일화와 결코 동의어일 수 없다. 진정한 연합과 일치는 내 의견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나 집착으로 대화가 힘들었던 경험이 있는가?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절대화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이지 절대적 신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가들은 복음의 본질은 공유하되 신학적 입장이나 교회 생활의 실천에서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성찬에 대한 의견도 다양하고, 예술에 대한 견해도 판이하다. 프랑스 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의 표현처럼 로마 가톨릭은 하나의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체계를 추구한 반면, 개신교 사상은 모순과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한다.    연합과 일치는 천편일률적인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하나하나”가 주님 안에서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다른 의견과 주장을 마음을 열어 경청하는 겸손함, 타인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넉넉함과 온유함이 연합과 일치를 꿈꾸고 소망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분의 마음을 품을 때(빌 2:5)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잔불도 꺼버리지 않으시며, 지극히 작은 생명 있는 것들의 소소한 감정조차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그분,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을 내던져 종의 형체를 가지사 인간이 되신 그 사건이야말로(빌 2:7-8) 교회와 성도가 흐트러짐 없이 하나 되어 따라야 할 명백한 대상이며 확고한 기준이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교계종합
    2024-01-30
  • [향유옥합]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입니다.  신약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꼽는다면 사도 바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에베소서 3장 8절을 통해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도 바울만큼 혈통이 뛰어나고 많은 지식과 많은 헌신을 하는 사람은 당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라고 소개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더 낫고 낮은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여기며 많은 헌신을 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자기 열심과 자기 신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성과 자기 열심과 신념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그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없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식한 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아주 작은 것들도 세세히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사소한 것조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조건 순종하며 따르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지극히 작은 일도 주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그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더 큰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하나님은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핍박과 멸시를 받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해 사람들은 대부분은 장애인, 노숙인, 고아, 미혼모들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작고, 더 멸시받고, 죽음의 위협에 까지 놓여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죽임을 당해 죽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태아들입니다. 하루에도 수백여 명의 아기들이 죄 없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모에게 조차 버림받은 가난한 자들이며, 사회에서도 멸시를 받는 자들으며, 교회의 침묵 속에 외면을 받는 자들입니다.      태아 생명 존중 사역은 낙태 유경험자들을 정죄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치유를 전하는 사역이며, 태아의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며 낙태를 예방하는 사역입니다.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낙태의 심각성과 태아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낙태’라는 핑계로 그동안 낙태 문제에 침묵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중에 작은 자 ‘태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은 가장 작은 하나님의 형상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섬기는 일인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아름다운 피켓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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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1-30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기억이 보인다(4)
    군 생활한 사람은 군번을 자꾸 외우다 보니 잊지 않고 장기기억이 된다. 주민등록번호도 늘 외우다 보니 장기기억이 된다. 이러한 장기기억은 측두엽의 기능이다.   장기기억 중 절차기억은 암묵기억, 신체기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릴 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방법 자동차 운전, 악기 연주, 피아노 치는 것 등은 몸으로 기억되어 5년, 10년의 공백이 있어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몸으로 하는 기억을 절차기억이라고 말한다. 시험공부, 수학공식이나 화학기호를 외울 때는 지식(머리)으로 기억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것은 서술기억 또는 외현기억이라고 해서 장기기억에 저장한다. 기억의 뇌인 해마의 신경세포가 감소하면 기억장애가 시작되고 치매의병이 진행될 수 있으므로 중·장년기에 있어서는 더욱더 운동이나 충분한 수면으로 뇌를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기억은 뇌로 하는 것이다.   장기기억은 측두엽의 기능이다. 장기기억 중 절차기억은 암묵기억, 신체기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릴 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이나 수영하는 방법, 자동차 운전, 악기연주, 피아노 치는 것 등은 몸으로 기억되어 5년, 10년의 공백이 있어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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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9
  • [변두리 소수자13] 바깥 뜰 지성소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중동, 유럽의 특정 지역을 ‘성지’(聖地, Holy Land)라 여긴다. 그런데 이는 ‘거룩한 터’라는 뜻의 ‘성지’(聖址, Holy Place)가 우리말에서 같은 발음이다 보니,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거룩한 ‘곳’을 가리킨 성지(聖址, Holy Site)는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관련된 곳’만을 지칭했었다. 그런데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관련된 모든 지역이 ‘성지(聖地 Holy Land)’가 된 것이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그래서 거룩한 곳을 '성역’(聖域)이라 구분했다.   하나님은 사람과 만나는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었다. 대제사장과 일년에 한 번 만나는 지성소(Holy of Holies), 하나님과 제사장이 만나는 성소(Holy Place),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안 뜰(Court of Israelites), 그리고, 이방인들의 바깥 뜰(Court of Gentiles)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막힘을 없애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분과 절차와 장소의 구분이 없어졌다. 우리를 직접 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집트의 동쪽과 시내 반도의 서쪽에 ‘시내(Sinai),’ 혹은, ‘호렙(Horeb)’이라는 산이 있다. 몇 해 전부터는 고고학자들 중에 사우디아라비아 안에 있는 ‘아발 마클라(Jabal Maqla)’가 성경의 그 산이라고 주장하고, 그러한 내용의 <떨기나무>라는 책도 출판되었다. 하지만 주류 유대교와 기독교계에서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산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소명과 십계명 돌판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난 곳으로 믿는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시내산   그곳을 가려면 카이로에 도착 한 후,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여, 차 편으로 반나절 정도를 이동하게 된다. 저녁에 그 산 아랫마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취침한다. 이튿날 새벽 2시 즈음에 등정을 시작하는데, 혼자라면 더 빠르게 올라 갈 수도 있겠지만, 보통 3시간 정도를 잡는다. 굳이 그렇게 어두운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는 일출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이다. 성지 ‘순례’이기보다, 명소 ‘관광’이라 할만하다.   그 곳을 재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집트에 도착 한 후부터 갑자기 마음이 공허하며 답답해졌다. 배정된 숙소에서 합숙자와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 “주님… 무슨 일이지요?” 잠을 설치다가 일어났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숙소를 나서며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교회와 가정의 형편도 좋고, 아무 불안함도 없는데,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마음이 힘듭니다.”   어두움 속에 가파른 길을 오르는 동안, 나는 아무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산 위에 모세와 하나님이 만난 곳을 기념하여 지은 판자집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하나님, 거기서 뵙지요…. 주님만 만나고 싶습니다.” 산 위에 도착해 보니, 어젯밤에 미리 와 있던 사람들과 계속 올라오는 이들이 다함께 모여 해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지나 비탈 언덕의 뒤로 돌아, 판자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니! 때마침 떠오르는 해를 보는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햇빛 때문에 더 진해진 그늘 속에서 나의 마음은 처절한 듯 했다. 거룩한 만남을 기대했던 ‘성지’의 잠긴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 아버지!” 외치며 통곡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산하기 위해 다가오기 시작할 때, 나는 얼굴을 닦으며 집의 다른 편으로 피했다. 그리고 곧 나도 그들과 함께 내려 걷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답답하지는 않지만, 평안해지지도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하나님, 하나님…”만 되풀이 하며, 터벅터벅, 한 발 한 발 내어 던질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허하던 가슴에 너무 분명한 음성이 채워지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높은 산의 가파른 길에서, 나는 하마터면 튀어올라 전속력으로 질주 할 뻔 했다. 너무 생생했다. “네가 나를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이 내가 너와 함께하는 증거이니라.”   나는 그 날 이후, 누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이 성역(sacred site)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성지의 역사성과 가치를 믿지만,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모하는 간절함이 더 소중해졌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요 4:23) /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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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6
  •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하나님의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삼상7:2) “여호와의 궤는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두고 오랫동안 안치되어 있었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온 족속은 모두 야훼께로 마음을 돌렸다.”(공동번역)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온다. 시간이 쌓이며 역사가 이루워지며 일직선으로 흘러간다.  사람의 일생도 태어나고 장성하고 생의 끝자락에 서게 된다.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며 우리는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스라엘은 역사의 고비마다 뒤를 돌아볼 줄 알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신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모든 백성이 종일 금식하고 회개하며 온전한 번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을 패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곳을 ‘에벤에셀’이라 불렀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이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도와주고 힘이 되어 주심을 믿고 의지함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항상 동행해 주실 것을 믿으며 고백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든든한 성벽일까.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자녀 삼아 주신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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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4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2·3·4부흥운동 통한 교회지원 주력 ─ 목자재단 이사장 조일래 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을 지낸 수정교회 조일래원로목사(사진)는 현재 목자재단 이사장으로써 작은교회를 돕고 아프리카선교에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조목사는 “총회장 시절 150곳의 교회를 선정해서 2·3·4부흥운동을 전개했다. 미자립교회 목회자 중 2시간 기도하고 3시간 성경을 읽고 4시간 전도하는 곳에 한해서 지원금을 전달했다”면서, “이것이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교단차원에서 이어가지를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역을 이어가고자 목자재단을 설립해서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2·3·4부흥운동이 한국교회 전체에 일어났으면 한다. 선교비를 더 효과적이고 알차게 쓸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뿐 아니라 카메룬과 챠드에서도 이러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으며, 공사를 못하는 어려운 교회를 1년에 20곳 선정해서 리모델링을 돕는 사역도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프리카지역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 진행과 전국교회에서 1일 부흥회를 진행하고 있다.     조목사는 사역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로 지난 2001년 기성교단의 교역자연금에 정상화를 이끈 것을 꼽았다. 수익성·보험성·공익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이 연금제도는 연금을 많이 낸 목회자들에게 혜택을 주면서도 작은교회 목회자들도 소외받지 않고 지원받을 수 있게 설계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목사는 한국교회총연합이 설립되기 전 한국교회연합 5대 대표회장을 역임했으며, 은퇴 이후에는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도 역임했다. 조목사는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을 하면서 교계연합기구가 하나가 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다고 밝혔다. 조목사는 “여러 교단 목사님들과 하나가 되는 일에 대해서 나누었다. 그리고 좋은 반응을 얻게 됐다. 하지만 한교연내의 사정으로 인해 아쉽게 현실로 옮기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하나가 안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교회를 생각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교단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이 참 아쉽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조목사는 “한교총을 중심으로 한국교회가 효율적이고, 발전적으로 하나가 됐으면 한다. 개교회들은 힘이 있다. 그런데 하나가 돼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 못한다. 한교총이 대사회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연합기구로 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 오피니언
    • 인터뷰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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