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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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유옥합] '희년'오늘,다시
     이 소영       “오랫동안 꿈을 그리던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13년 전에 처음으로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이다. 20세기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지드(André Gide)가 남긴 명언이다. 그 당시 좋아했던 문구였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났다. 이 글을 페이스북에 처음 남긴 그 날의 나를 기억해 보면, 지금 내가 ‘희년함께’라는 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꿈같이 여겨진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적었을까? 그때가 아마 나의 꿈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던 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여러 기독교 단체와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토지정의를 위한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희년함께’를 만나게 되었다. 사적인 믿음에서 공적인 믿음(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참여한 독서 모임에서 내 인생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예수원 설립자인 故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경제정의》와 19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진보와 빈곤》이었다. 희년 강의가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빠지지 않으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트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공부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공부하고 훈련하며 배움의 열정과 기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또 울려서 드디어 듣는 사람의 가슴이 끓어오른다. 지금 세계에는 강한 정신과 고결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감옥에 갇혀있고, 인생에서 피어나는 진선미를 철의 수레바퀴가 깔아뭉개고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中 -   그 이후로 오랫동안 희년함께 회원의 자리에 머무르다 지난 2022년 2월부터 정식으로 희년함께 실무자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희년함께/희년은행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며 간사로 근무한 지 어느덧 2년이지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13년 전에 처음 참여했던 독서 모임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지난 주부터 ‘헨리조지와 함께 기도하기’라는 주제로 희년함께 실무진뿐만 아니라 단체회원들도 함께 《진보와 빈곤》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13년 만에 인생의 책을 다시 만나니 처음 이 책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것들이 새로움과 깨달음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특별히 “왜 사회가 진보할수록 빈곤이 생기는가”에 대해서 사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그 시대가 지닌 과거 경제사상을 깨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펼쳐가는 헨리조지의 노력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곳곳에서 헨리조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멋진 글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함께 읽고 대화하고 나의 인생 구절을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의 기도가 되어 지금 우리 시대에서 제2의 헨리조지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땀의 가치는 땀 흘린 이에게, 땅의 가치는 모두에게”   올해는 특별히 희년함께가 출범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희년함께가 걸어온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새롭게 그려갈 그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희년함께에서 일하고 있는 자리는 2년 전 하나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오랫동안 담당했던 일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디며 아픈 몸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숨이 다할 때까지 희년의 사역을 감당해온 남편의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남편의 자리를 대신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희년함께’는 40년 동안 희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려운 숙제들을 잘 감당하며 풀어가고 어려운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이끌어주고 배려해주는 헨리조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틈에서, 올해부터 새로운 멤버로 합류하게 된 사역팀장과 함께, 단체의 역사를 배우고 책 모임을 하면서 새롭게 알아가며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희년함께의 사역 활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며 공부하는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13년 전 내가 희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마주했던 기쁨과 열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놓치지 않으려 노트에 빼곡히 적었던 것처럼, 헨리조지가 가진 열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희년함께가 땀 흘려 걸어왔던 길을 희년의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려 한다. 천천히 오래 꼭꼭 씹으면서.. / 희년함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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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향유옥합]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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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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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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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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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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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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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선냄비의 계절이 왔다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을 시작으로 나눔과 돌봄의 겨울이 돌아왔음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1865년 월리엄 부스에 의해 창립된 구세군은 전세계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과 돌봄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그 어느때보다 이웃을 위한 온기가 절실한 때이다. 지난달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진행된 자선냄비 시종식은 코러나19 감염예방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됐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 시기에 주요 지하철 및 거리에서 울리는 자선냄비는 매년 사랑을 실천하는 기부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자선냄비를 통해 모아진 성금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매년 조금씩 감소하던 모금액이 올해는 사회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심해지며 모금의 손길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지하철역사 등 실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자선냄비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줄어들면서 모금액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이에 구세군은 휴대폰으로 QR코드를 찍어 기부하는 비접촉식 기부방식을 활성화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 거리 자선냄비에 QR코드를 설치하고 비대면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온라인 결재 앱 등을 통한 QR 기부도 독려하고 있다.   그동안 연말이면 사회복지단체를 사칭하여 가짜 모금을 해왔던 사람들이 적발된 경우가 종종 생기며 일반 국민들의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왔다. 수년전에는 구세군 냄비를 사칭한 가짜 냄비가 나타나며 국민들의 불신의 골을 깊게 했다. 그럼에도 올해 코로나사태로 인한 어려움은 소외된 이웃들에게 더욱 힘든 겨울을 나게 할 것이기에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성금기부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거리의 자선냄비 뿐 아니라 힘겨운 겨울을 보내는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지역 불우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추운겨울 불우이웃을 돕는 따뜻한 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불우이웃을 위해 작은 정성이라도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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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사랑과 평화 연주하는 성탄절 준비하자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전염으로 불안하여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 역시 기쁘기보다 어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지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게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베들레헴 말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도 차분하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맞이함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뜻있게 맞이하려면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섬김이다. 특히 금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제가 크게 위축되어 있고 사람들도 움츠려 있다. 이런 때일수록 음지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찾아보고 돌보는 섬김이 성탄의 뜻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교회들도 역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집회도 마음대로 갖지 못하고 헌금이 원활하게 들어오지 못함으로 매우 힘들 때이지만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의 정신을 본받아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어느 해보다 금년의 섬김이 더 보람된 일이라 생각된다.   성탄절은 어둠의 음지에 갇혀있는 곳을 빛으로 비추이는 나눔의 섬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천사들의 찬양처럼 “지극히 높은 곳에선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한 말씀이다. 성탄은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한다. 평화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만든다. 마더 테레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그의 섬김 사역이 온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는 평화를 실천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 장례식 후 인도 콜카타는 많이 변해졌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세계의 수십명의 정상들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랑의 한 사람이 준 영향은 대단하였다.   성탄의 큰 의미는 사랑으로 이땅에 오시는 우리 주님의 섬김으로 그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를 어둠의 죄악에서 밝은 빛의 세상으로 해방시켜주신 구원의 날이 곧 성탄절인 것이다.  /예장 통합측 전 총회장, 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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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0-12-09
  • 생명나무제자훈련원 이영희목사
      “기도란 무릇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만 응답받는 것으로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고 만나며 관계 맺는 것이다”고 말하는 이영희목사(사진).   예장 한남중앙노회 노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목사는 생명나무제자훈련원을 운영하며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의 영성 훈련을’이란 표어로 한국교회의 영성 회복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25년 동안 부흥사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영성과 제직훈련의 전문가로 미자립교회 지원과 청지기 교육을 기반한 초교파적 영성훈련에 매진하고 있다고 전한 이목사는 “그간 한국교회에서 주로 강조하던 기도는 성공을 바라고 신앙적인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기도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계속해서 소통하면서 깊이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영성이 자라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신앙인을 기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급격히 세속화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회복하기 위해선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이목사는 “호랑이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과 말로만 듣고 아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다”며, “직접 본 사람은 보지 못한 이에게 말로는 절대 전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이 있다”고 피력했다.   끝으로 “하나님을 글과 말로 접하기만 해서는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없다”며,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신앙이 복음으로 나아가는 이정표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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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연세대 일반대학원 박사원 유정우선생
      연세대 일반대학원 박사원 소속 유정우선생(사진)은 “우리 시대에 교회의 가치는 완전히 무너져 있다고 본다. 나는 미국에서 음악을 하다 신학을 하게 된 케이스다”며, “당시에는 신에 대해 궁금했다. 철학을 하며 신에 대해 배우고 싶었지만 먼저 신학을 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연세대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난 지금 돌이켜 보면 신학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신념과 전제들을 합리화하기 급급한 분과였다”고 말했다.   유선생은 “기독교적인 눈으로 보면 신학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철학의 눈으로 보면 신학은 참으로 비논리적이다”면서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 사랑의 가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사랑을 우리사 회에 몸소 보이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의미에 대해 회의적이다”고 비판했다.   교회의 미래에 관해 유선생은 “교회는 386컴퓨터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386컴퓨터에 부품을 바꿔가며 시대에 맞추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면서 “미안하지만 교회의 미래에 아무런 기대도 없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과거에는 교회가 말하는 교리나 행태가 매우 폭력적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심지어 폭력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사람들을 협박하면 그러한 협박이 통했는데, 이제는 전혀 안 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형용모순이 가득한 공동체라 생각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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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쉽게 배우는 한의학] 아토피성 피부염(3) - 아토피의 원인
      2) 유전적요인: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 아토피 발병의 한 요인이 될 수는 있으나, 음식이나 생활습관 및 환경적 원인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토피의 발병 원인이며, 유전적인 인자만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3) 식생활에 의한 원인: 식생활 습관이 과거에는 채식 위주로 직접 조리하여 먹는 생활이었던 반면에 지금은 육식 위주의 식생활로 바뀌었고, 훨씬 다양한 조리법과 수많은 인스턴트식품을 먹으며, 많은 종류의 식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식단을 차릴 수 있다. 그 가운데 유제품(버터, 치즈 등)의 과도한 사용, 화학조미료의 사용, 인스턴트식품의 범람, 다양한 식품 첨가물, 육식의 증가, 특히 튀기고 볶고 굽는 음식을 좋아하는 습성은 아토피성 피부염뿐만 아니라 건선이나 지루성피부염 및 여드름 같은 자가면역질환의 증상을 훨씬 다양화시키고 있다.   a. 식품첨가물의 과도한 사용 △착색제 니코틴산에 의한 중독 △표백제 아황산나트륨의 독성 △발색제 아질산나트륨의 독성   b. 유전자 변형 식품(GMO 식품) GMO 식품의 폐해(예, 광우병)는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어떤 새로운 질병을 야기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하면 외식이나 패스트푸드와 식품첨가물이 가미된 간식 종류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현대인의 생활여건은 외식을 안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적게 먹거나 피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c. 동물 사료에 포함되는 항생제의 간접 복용 문제   d. 100% 유기농 음식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완벽한 유기농 채소는 없다. 햇빛, 물, 공기, 영양소가 모두 있어야만 식물이 자랄 수 있지만, 햇빛은 이미 오존층의 파괴로 옛날의 햇빛이 아니라 자외선이 범람하여 동식물에 악영향을 미친다.  요즘 산성비를 맞고 다니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비를 맞고 다닌다는 것은 소설속의 이야기로 토양도 산성화되어 식물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며, 식물의 뿌리를 통한 영양분도 중금속과 오염물질 가득한 황사로 전 국토를 오염시키고, 알레르기성비염과 천식 및 알레르기성결막염 등 환경성 질환을 증가시킨다.   e. 지나치게 단 음식 4) 면역기능 병원균과 바이러스는 인간이 생활하는 곳은 어디에나 상존하며 수시로 우리의 몸속을 들락거리면서, 면역기능의 교란으로 인체의 방어력이 떨어져 비집고 들어앉을 허점만 있으면 터를 잡아 질병을 유발하고, 면역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허약한 틈이 없으면 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질병에 걸리는 것은 면역체계가 붕괴되어 자연치유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의학 평론가인 프레드릭 박사는 “현대의학이 자랑하는 약이나 수술로는 성인병이 절대로 낫지 않는다. 식이요법으로 구할 수 있는 환자들에게 약을 사용하고 수술을 하는 통에 오히려 환자가 죽어 가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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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호산나] 코로나는 메시아 재림 예언의 성취 (2)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21:11).예수메시아-주님께서 당신의 재림의 시점에 대한 예언의 말씀 중 ‘전쟁·지진·기근·전염병’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 말씀에서 ‘전쟁’은 2020년 현재로 매우 임박한 3차 대전과 핵폭발을, 그리고 ‘기근’은 전쟁에 따른 농사일의 중단과, 이에 따른 각국의 식량 매점매석을, 그리고 ‘전염병’은 오늘의 전 인류적 ‘팬데믹’현상을 예언해 주신 말씀이다. 교회가 저 팬데믹을 성경으로 필히 해석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는, 우선 저것을 예수 메시아께서 친히 아마겟돈 전쟁과 함께 예언하셨다는 저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 메시아 재림은 아마겟돈 전쟁, 즉 3차대전 막바지에 재림하시는 것으로 모든 예언서가 명명백백히 말씀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위 예수님의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는 말씀이 그러하고, 이는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선지자들도 선명하고, 특히 계시록 전체는 아마겟돈 전쟁 폭발의 과정, 주인공, 첨단무기에 의한 “사람 3분의 1이 죽는 3차 대전을 거의 문자적으로 예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팬데믹’현상은 세 번째다. 첫 번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인 “페스트”이다. 그런데 약간의 의구심은 있지만 1342년 몽골의 킵차크 칸국(한국)이 흑해 연안에 있는 이태리 옛 도시 베네치아(베니스)를 공격했는데, 포위가 길어도 효과가 없자 몽골군은 페스트로 죽은 시체를 투석기를 이용, 성안으로 날려 보냈다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팬데믹이었다. 두 번째는 1차 대전이다. 즉 1917-1918년에 “스페인감기”로 이름 붙여진 전염병이 유럽에서 시작돼서 약 2년 동안에 2천~5천만 명쯤의 희생자를 냈다. 특히 1차 대전 종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늘의 코로나도 전 인류적인 전쟁, 곧 위에 지적한 예수 메시아-주님의 재림에 따른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예고하심의 징조라는 것. 이런 해석은 신구약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재림의 징조로 “전쟁과 전염병”을 예언해 주셨기 때문이다. 말세지말의 교회로서 저것들을 단 한 순간인들 모른 척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지적돼야 할 것이 있다. 코로나 ‘전염병’은 매우 뚜렷하게 선진강대국들을 휩쓸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상하게도 보건의료 및 의약 의술이 세계 최고인 유럽제국을 휩쓸고 있고, 특히 세계 유일초강국 미국이 현재까지 코로나19 전염율의 최고치를 달리고 있다는 것. 한편 이란 등 이슬람제국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는데, 이들도 위에서 지적한 아마겟돈 전쟁, 특히 계16:12이 말씀하는 “동방의 왕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염병의 취약지대라 할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등은 놀랄 만큼 덜하다는 것이다. 즉 저들은 인구의 2~3%인데 후자는 0,2~0,3%, 그러니까 10:1로 전염율이 적다(조선일보). 한편 저 북한이 끝내 특별한 소식이 없다(살인적 통제국이긴 하지만)것도 주목할 일이다. 물론 중국은 의문점 많은 ‘완치’를 말하지만…, 최초의 코로나19의 근원지였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위에 “동방의 왕들”(필자의 계16:12강해 참조)중 ”우두머리“(겔38:7)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오늘의 교회로서는 코로나 팬데믹을 기껏 “정부의 교회를 향한 종교적 탄압인가, 아닌가”만을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말세지말인 오늘의 교회는 예수 메시아-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천국의 열쇠”(마16:19)를 허락받은, 즉 전체 인류의 미래 운명을 실질적으로 책임 맡고 있음을 “아니오”할 형제는 없겠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신구약 66권이 말씀하는 ‘교회’의 정체성은 요컨대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인류 역사는 단 1초도 연장이나 존속이 불가능이라”는 저것이다.  /기성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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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마라나타] 사랑의 확증 (2)
    우리는 결혼을 할 때 영원의 상징인 동그란 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주며 서약을 한다. 이제 남편은 부인만을, 부인은 남편만을 영원히 사랑하기로 약속 한다. 이 세상에서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고 행복인 것을 우리는 안다. 나만을 사랑할 거야. 사랑은 약속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아름답다. 선악과를 먹지 않기로 하나님하고 사랑의 약속을 하고 약속이 지켜질 때 우리는 행복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리고 함께 사랑을 나누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필요하셨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만드시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데로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각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을 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흐믓하시고 또 얼마나 자랑스러우셨을까! 그러나 그 어느날 저녁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도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시고 찾아주시는 나의 아버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를 사랑하심은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장 19절)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로마서 5장 8절)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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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성령'과 동행하는 새 날들] 주와 화목케 하는 사랑
      전도로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창조주 영혼구원자로 믿고 바로 섬기게 하려면, 마태복음 16장 24~26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라는 말씀을 바로 알고 좇아 이에 맞는 존재 목적에 대해 새 패러다임을 정립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이는 복음을 들은 자들이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 부르심의 뜻대로 사랑의 실천을 하여야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아, 새 생명과 평안의 감사로 더욱 주를 사랑하는 지체가 되어 주와 화목케 되는 사랑의 결과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주종의 관계를 갖지 못하면 육에 속하여 육신의 것을 좇고 성령을 거스려 주의 이름은 부르나 주로 인한 새 생명과 평안을 얻지 못하기에 주를 좇는 자세는 참으로 중요한 울림을 준다.   곧 바꿔진 가치관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종의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중요한 핵심이다.   새 패러다임은 전도서 12장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신 증거의 삶으로 결실을 맺게 한다.   즉 주를 좇는 자세와 목적에 바른 정립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기부인이기에,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할 수 있도록 오직 주의 종으로 기쁨을 갖고, 사람 살리는 일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아 성령과 동행하는 영생에 길로 견인이다.   이같이 성령을 따라 새 패러다임에 믿음은 갈라디아서5장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심같이 변화되어 소금과 빛의 직임을 기쁨과 감사와 기도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임을 확증한다.   이와 같이 가르쳐 지키게 함의 순종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는 결과를 얻게 하신다.   거룩함을 덧입은 의의 종은 주와 복음을 위한 존재 목적을 갖고 좇아 이르게 된 영적 새 피조물로써 전도로 더 많은 이들이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주와 화평을 위한 몫에 존재이다.   곧 화평하게 하는 말씀은 이웃의 영혼들이 주와 화목케 되는 전도자의 몫에 연계되어 이웃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영생의 좁은 길을 성령과 동행하는 의인의 거룩한 삶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하심같이 영생에 이르게 되는 복을 알고 주와 동행하여 이웃 사랑으로 주의 뜻을 이뤄가는 여정의 몫이 주의 백성들의 본분임을 기쁘게 감사로 확증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교육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주를 경외할 수 있는 지식과 마음이 악에서 떠나 영 분별하는 명철을 받아 성령에 의한 천국백성의 삶을 믿음으로 영위하게 하는 주 섭리이다.   그러므로 바꿔진 가치관으로 주를 영혼 구원자로 믿고 섬기는 자는 종의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좇아 의의 종이 되어, 성령과 동행하는 믿음의 성화로 주와 복음을 위한 존재 목적에 주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의 능력을 힘입은 제자임을 확증한다. 복된 주의 종으로 은혜 주신 감사를 깊이 새기며……. /오이코스대학 객원교수, 바이블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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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8
  • [호산나] 코로나는 메시아 재림 예언의 성취 (1)
      오늘의 ‘코로나’는 교회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섭리를 주의-주목하게 된다.    무엇보다 2000년 교회사에 예배를 방해했던 세력들은 어디까지나 사단 그 자체, 또는 사단의 노예인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코로나는 하나님의 직접 섭리이다. 왜냐하면 질병 자체가 인간의 범죄의 결과이고(창 3:17~18),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의 징벌을 “전염병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게 하신”(삼하 24:15)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관심은 다윗왕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인구 숫자’(삼하 24:1)를 헤아렸다는 것으로 향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의 병력 숫자를 점검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스라엘은 여호와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거룩함’(레 11:45)에의 요청 때문이다. 오늘의 코로나는 말세지말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소위 ‘비대면 예배’를 강요당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교인 머릿수 통계’중단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한 경고다.    이에 대하여 계시록 12, 17장은 저 물량주의의 잘못을 “물위에 앉은 큰 음녀”라고 지목, 예언해 주셨다. 이 때에 ‘물’이란 곧장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계 17:1~15참조)고 귀띔해 주신다. 이어서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이 말씀 중에서 1절에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란 먼저는 중세 및 오늘의 천주교회, 특히 ‘교황청 및 교황’이다. 예컨대 2013년 광복절에 방한한 프랜치스코는 세종로 거리에 30만(필리핀에서는 800만)군중을 운집시켰다. 한편 위 말씀 중 ‘여자의 자주 빛 붉은 빛 옷’은 오늘의 가톨릭의 신부들의 미사 집전 예복을 지목한 예언의 성취다. 물론 옷 색깔 자체의 뜻보다는 중세로부터 오늘까지의 가톨릭이 과시하는 종교 및 세속적 권위, 특히 위에 말한 교황의 ‘물위에 앉은 음녀’로서의 빗나간 교회(corrupted church)의 저것을 지목-예언하심이다. 물론 이 같은 교회풍토에서 위에서 예를 든 개신교가 제외가 될 수 있을까?    이에 알 것은,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직접 계시 받은 선지자들은 절대로 예외가 없을 만큼 ‘물-군중’과 극과 극의 ‘광야에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가 누리고 있었던 당시의 온 세계를 호령하는 바로 왕궁의 저것은 오늘의 대통령, 국가 원수가 정도가 아닌, 저 솔로몬 왕의 영화와 비견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저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돌진했다. 이것이 없는 선민 이스라엘의 탄생 자체는 상상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모세가 십계명을 계시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군중-물’로부터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었다. 특히 저 모세의 ‘광야’의 절정은 홍해를 건넌 직후 ‘신 광야’에서였다. 이 같은 예언자-선지자로서의 특권인 ‘광야’의 선결 조건은 엘리야도, 다니엘도,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예수 메시아께서 친히 저 ‘광야’의 극치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위에 메시아께서는 동족-군중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마저 버림받고 있었다. 물론 이는 인류 역사상 절대로 재연될 수 없는 모순(contradictory)이자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의 예수 메시아께서는 곧장 유일절의 여호와 하나님과 본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말 것은 예수 메시야의 저 ‘광야에의 고독의 극치’가 인류를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자체였다는 것이다. /기성측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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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1
  • 종교인 세금에 관한 모든 것(1)
      문 1. 교회 등 공익법인인 출연(기부)받은 재산을 매각하는 경우에는 매각금액을 매각한 날이 속하는 사업연도의 종료일로부터 1년내 30%, 2년내 60%, 3년내 90% 상당하는 금액 이상을 직접 공익목적에 사용하여야 합니까? 답) 매각대금은 직접 공익목적에 사용하여야 합니다. 사업연도 종료일부터 1년내 30% 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가산세, 2년내 60%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가산세, 3년내 90%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증여세가 부가됩니다. 문 2. 교회가 정기예금을 하였다. 이자소득세 환급절차를 알려주세요. (영리사업 없이 비영리사업인 종교단체일 경우) 답) 교회의 이자소득은 예를들면 201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교회가 정기 예금한 은행으로부터 「원천징수영수증」을 발급받아 2020년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법인세 신고를 관할세무서에 제출하여 이자소득세를 환급받는다. 환급받은 이자소득세는 3년 이내 종교 고유목적사업에 사용하고 지출영수증을 발급받고 세무서에 신고 제출한다. 경기도 모 교회는 정기예금 이자소득세 약 3천만원을 환급 대행하고 있다. 울산, 포항, 대구, 전주, 대전, 속초, 인천, 서울의 교회의 이자소득세 환급 신고를 하였다. 문 3. 교회의 부동산을 3년간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한 후에 타인에게 임대하였다. 교회에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해마다 재산세는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교육관으로 3년간 사용하였다면 교회에서 취득시 감면받은 취득세는 추징되지 않으며 타인에 임대한때부터 해마다 재산세가 과세됩니다. 문 4. 교회의 경외에 교인 및 교회용 무상 주차장을 설치하여 운영합니다. 교회로 직선거리 300m 이내에 설치한 주차장과 도보거리(골목거리) 600m이내 설치한 교회의 무상 주차장은 취득세와 재산세, 종합부동산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차량, 교인들의 예배참석차량, 인근주민에 무상주차하는 차량의 주차장은 취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가 비과세 됩니다. 문 5. 교회의 교인수송용 차량과 담임목사의 선교용 차량에 대하여 자동차 취득세, 자동차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모든 차량은 과세됩니다. 문 6. 교회로부터 인접된 토지의 담장을 철거하고 1구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답) 교회로부터 직선거리 300m이내와 골목거리 600m이내 소재하는 교회의 무료주차장은 취득세와 재산세가 비과세 됩니다. 문 7. 교회 담임목사의 종교용 주택을 2년간 종교용에 직접 사용한 후 제 3자에게 임대하고 새로이 취득한 주택은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답) 2년간 종교용 담임목사의 주택은 취득세 추징 과세됩니다. 문 8. 은혜교회는 유치원을 건축하고 원아들에게 유치원 교육비를 받고 운영합니다. 주일에는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무상으로 교육하고 예배드립니다. 취득세와 재산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유치원은 종교고유목적사업이 아니므로 취득세, 재산세가 과세됩니다. 문 9. 교회가 불우노인 복지사업을 하기 위하여 교회 직원회의 결의로 유료 양로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취득세, 재산세와 양도시 법인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에서 불우노인 복지사업을 위하여 유료 양로원을 운영할 때 취득세, 재산세, 양도시 법인세가 과세됩니다. /세무사·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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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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