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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4)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필연적인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고, 우리가 해야 할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온전히 진리로 살아갈 motivation을 줍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여, 오히려 그것을 제거하여 우리의 영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우리 삶의 앞에 놓였던 길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direction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 대한 온전하고 명확한 분별력을 주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편,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사탄의 일에 동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많은 크리스천들도 이 일에 무지불식간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이 땅에서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일에 동참하게 됨을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재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일에 동참하게 됨을 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통과 교제가 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영적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한 자들이라고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영적분별력의 부재로 인해, 또한 그들의 이 땅에서의 재정과 축복을 바라는 세상적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저 내가 축복을 받고 사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을 전적으로 걸고, 진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영적전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전쟁의 삶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기복적인 신앙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변화되어야 할 많은 영역들이 있고, 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진리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그러한 진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씀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길러내고 양육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세상의 그 땅으로 강력히 나아가서 변화를 일으킬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충만이 강력히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은 16:15)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구원도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재정구축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오는 축복보다는, 재정구축으로 오는 축복이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통치하게 되는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하고 거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이것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 제뉴인글로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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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
        하니프(David Hanif) 작가의 「Hope」는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매달고 달리는 이색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형편을 알게 되면 충분히 그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에 온 인물로 지금은 법무부 위촉 사회 통합 이민자 멘토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쟁과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작가는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난 3월 12일 KBS의 이웃집 챨스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알려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우리가 알듯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탈레반이 있는 나라로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무역 센터 알카에다 테러공격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16년 전에 한국에 왔지만 20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동신교회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고통을 겪은 그는 이 풍선들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랑하고 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국의 봄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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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에레모스 영성10] 광야를 닮은 소리(1)
    광야로 일컬어지는 곳을 연상할 때 떠올려지는 첫 이미지는 ‘거칠다’일 것이다. 영어표현 그대로 와일드(wildness)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미를 덧붙여 야성(野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야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거칠고 투박한 채로 남아 있기에 자연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문명이나 문화는 사람의 인위적 행위가 더해지게 된 결과물인데 이에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고 오히려 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 저 편의 암울한 파괴 현장을 목도하게도 한다.   구약 신명기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도록 하고 그러한 돌들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고 가르친다. 자연석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인류의 문명사가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 즉 하나님께 대한 충직한 신앙 그 자체를 성경은 ‘자연석’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곧 벧엘 야곱의 돌 그리고 요르단 강 길갈의 12개의 돌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돌, 변하지 말아야 할 돌 그래서 신앙은 그러한 돌과 함께 대대로 기억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광야를 닮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광야의 그 자연스러움, 꾸밈없음, 있는 그대로의 모습, 다소 거칠게 느껴지고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구약 성경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 배경사에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과는 대조되는 순박한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우리는 광야의 풍미(風味)와 광야의 야성(野性)을 닮은 영성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이른바 광야의 소리가 주는 울림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울림을 전하고 싶다. /가락재 영성원 원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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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 성서와 생활 [22]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만찬의 영성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지성소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림을 받게 된 것이다.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주님이 구원의 영원성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구원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원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갓 죽임을 당한 것”계5:6같아야 한다.    예배의 현장 속에서 성만찬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축복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태도에 있다.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자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에 속하여 죄의 유혹에 빠져 의심 많은 자들을 온전케 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념할 때이다. 흔들리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안전한 구원의 피난처가 된다. 영원히 낡아지지 않는 십자가의 구원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어린양이 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어린양에 대한 영성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에서 매일 밝히 보이는 사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를 잃어버린다면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3:1십자가를 통해 항상 감동을 받는 믿음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속에 십자가의 사역은 살아 역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항상 새로운 길이 되어야 한다. 항상 살아 있는 영원한 십자가의 계시를 통해 감동받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십자가의 이상을 새롭게 볼 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는 믿음의 체험을 매일 새롭게 가지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함으로 그 피가 우리를 옛 창조의 근거를 제거해 버린다. 혈과 육이 제거되니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성만찬의 예식은 예배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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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아가서' 솔로몬의 노래 (14) 나로 네 용모를 보게하라
    우리는 앞서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치자 꽃이 피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 이를 영적으로 잘 깨달았다. 즉 장차 있을 환란과 주 재림과 천년왕국의 신비한 비밀들이다.    2:13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들이 구원의 열매를 내는 것은 무화과나무로서 푸른 무화과 열매를 내는 것이다. 또 포도 넝쿨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참 포도나무에 붙은 넝쿨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또 제자와 같은 신앙인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재림하신 주께 찬송하며 영광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 떠나자’는 ‘함께 떠나자’고 말씀하심과 같다. 앞의 10절에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는 신부에게 ’일어나서 함께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 13절이다. 본문에 ‘함께 떠나자'는 영적으로 계속해서 성도의 신앙을 진전시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계시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곳으로 주님과 함께 떠나자는 말씀이다.    2:14 바위틈과 가파른 산 은밀한 곳에 있는 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고 나로 네 음성을 듣게 하라. 네 음성은 달콤하고 네 용모는 아름다움이라. '오 나의 비둘기야'는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를 부르는 호칭이다. 여기서 신부 성도 될 자의 호칭이 바뀐 것은 신앙이 더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마10:16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수하라고 말씀했다. 즉 비둘기는 신부의 신앙 정절을 가리킨다. 주님이 사랑하는 신부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정절로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중심이 되면 ‘오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틈과 가파를 산 은밀한 곳에서는 깎아진 절벽 밑의 검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틈 은밀한 곳은 악한 들짐승과 바다의 짐승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써 안성맞춤이다. 이와 같은 피난처는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피난처로 삼고 있는 자는 풀무 불이나 사자 굴에 들어갈지라도 끝까지 신앙 정절을 지킨다. 우리의 피난처가 어디인가? 참 피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로 네 용모를 보게 하라 하심은 신부의 용모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부 얼굴에 면사포를 쓴 것과 같이 가리워서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보여준다. 신랑 예수님만이 신부의 얼굴 위에 있는 베일을 벗겨서 보실 수 있다. 그럼 왜 신랑 예수님이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온몸으로 열매 맺고 이긴 것의 결과는 얼굴에 영광이 나타난다. 사람의 인격의 대표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신부의 용모를 보기 원하시는 것은 네 자신의 온몸(인격)이 변화된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도의 신앙 변화의 마디마디가 있었다.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던 때도 있었다.      앉은뱅이처럼 신앙의 침체기도 맞았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셨다. 주님과 한 몸 되어 주님의 사랑을 채워주셨다. 계속하여 변화시키는 역사를 해주셨다. 이제 얼마나 변화됐는지 신부의 모습을 보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인격으로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또 주님은 신부의 음성 듣기를 원하신다. 음성은 사상을 의미한다. 주님 없이는 못산다고 울고불고하던 상사병이 고쳐진 것이다. 즉 인본적인 신앙에서 신본적인 신앙으로 바꿔진 것이다. 그 신부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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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5
  • 성서와 생활 [21] 그리스도인의 영성-십자가 생명의 영성
       십자가는 주님의 사역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야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뜻은 인간 죄를 대속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십자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일상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자랑했다.갈6:14‘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사도 바울을 주님을 위해 모든 고난을 견디셨다. 십자가를 최고의 능력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십자가가 바울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요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그 결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던 사울 바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죽음에 넘겨질 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을 체험적으로 알아 성령의 통로가 될 것이다. 전하는 말과 함께 행할 능력도 줄 수 있는 십자가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몸에 계속 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했다. 우리의 생명도 십자가의 생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사도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날마다 경험하는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들을 주님의 정신으로 견딜 수 있어야한다. 바울처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는 십자가의 생명으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만 한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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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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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와 생활[3]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주 예수그리스도가 베풀 세례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나온 것처럼 장차 아들도 사망을 이기고 나옴을 보여 주신다. 우리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을 받았다. 죄의 종살이에서 주님의 승리로 자유함을 얻게 된 사실을 감사하게 하신다.    먼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는 애굽에서 구원받은 감사로 끝나지 않는다. 실로 감사는 구원의 관문인 세례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다.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건지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모든 악으로부터 보전하여 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이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구속의 감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예표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는 ‘우리를 원수 마귀 대적에게서 건지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음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주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어 감사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시편 136편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라고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음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신다. 우리도 전에는 악이요, 육이요, 죄인이요, 멸망할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악을 주님이 이기신 사실로 인해 이길 수 있음을 감사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감사는 오늘날 주님의 승리로 완전한 감사에 이르게 하셨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눅10:19)주심을 감사함으로 아들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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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성서와 생활[2] 그리스도인의 영성 -감사의 영성(2)-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시136:6) 천지창조의 둘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그러나 이 땅은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에 노아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조성되어진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땅에 대한 비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도래를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땅에 대한 감사를 배우게 하신다. 땅을 물 위에 펴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질 나라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충만한 땅에 대한 약속을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이다. ‘해로 낮을 주관하신 자에게’,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천지창조의 넷째 날에 대한 감사를 더욱 강조하고 계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라는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 빛으로,그의 몸된 교회로 큰 광명이 되심을 감사하게 하신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손과 팔로 인한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친히 구원하심을 감사하라고 하신다. 어머니가 그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오직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낳으시고 돌보신다. 이에 대해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 일은 아들의 영으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그의 인자한 사랑을 아는 아들을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아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증거해 준다. 감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자들로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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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7회] 지혜로 좇는 사랑 실천과 앎에 대해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리는 제자의 삶으로 순복에 의한 성화  로마서 12장 1~2절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시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권하셨다. 오직 주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일에 참예하여 온전하신 뜻을 위한 사랑 실천에 증거이다. 부르신 목적에 연계로 존재의 몫을 하여 선한 열매로 영광 돌려 드리도록 믿음의 성화를 위함이다. 이 세대는 자신을 위한 자들로 육에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주종의 관계를 성립하지 못해 아직도 종의 몫을 우선순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이처럼 주의 영이 없는 이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로마서8장5~8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하심의 이유로 확증해 준다. 주의 영이 없는 자들은 주의 일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의 뜻대로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배움을 갖고 종의 자세로 몫을 하려는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복함임을 확증케 한다. 결국 존재의 목적이 주의 복음 전하기에 유익함임을 발견케 한다.    죄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자유케 하심은 주와 복음을 위해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하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신령한 예배라는 표현으로 삶에서 전도로 이웃들을 살리는 일에 참예하여 주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과 동행임을 확증해 준다. 이를 알고 행할 수 있는 주의 종들은 위엣 것에 가치를 두고 주를 경외하여 사람 살리는 몫에 가치를 두고 믿음을 행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화답하는 여정으로 늘 성령과 동행하는 참 주의 친구로 장성한 성화를 이룬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이에 더 큰 사랑이 없음의 연계이다. 곧 주와 거듭난 자의 사랑의 줄은 어떤 것도 끊지 못할 것의 믿음이다.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절대 지키심과 견인으로 믿음의 성화임을 확증케 한다. 곧 주를 안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감사로 기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지혜이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믿음의 성화로 얻는 행복과 기쁨은 주 안에서 진리로 자유케 되어 선을 이루는 것들임을 확증케 한다. 곧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화답하는 몫이 기쁨과 행복의 비결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새 생명의 가치를 알고 말씀에 순복하는 자들은 소망을 갖고 오늘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드리는 지체의 삶임을 확증해 준다. 외식하는 자를 본받지 아니하고 정욕을 위해 구하지 아니하며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과 하늘로부터 온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주의 친구된 주의 백성들의 지혜로 행복이다. 곧 바꿔진 새 가치관의 행복은 풍성한 생명으로 범사에 감사이며 온전케 하는 주의 뜻에 가치를 둔 앎으로 견인된 믿음의 성화임을 확증해 준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행복을 영위하는 지혜의 비결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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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주 예수’를 좇는 참 행복 6회] 주와 복음 위해 사는 새 피조물의 몫
      다시 사신 주님의 자취를 좇는 기쁨과 행복을 알고 행하게 하신 주 은혜 성경은 새 피조물이 된 기쁨과 감사를 주님 사랑과 연계하여 행복한 몫을 발견하게 한다. 그 사랑의 감격과 감동을 체휼하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살리신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변화이다. 더불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몫에 자세를 자각하게 한다. 주께서 목숨을 주고 얻게 한 의인으로 칭의이기에 그 값비싼 구속에 대해 사랑의 계명을 지켜 성화임을 확증케 한다. 주로 인하여 새것이 되었기에 그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그속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존재의 목적을 갖는 신앙인이 됨이다. 살아도 주를 위함이며 죽어도 주를 위함이라는 종의 존재 목적이며 오직 주를 위해 거룩함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과 선함을 위한 성령의 내주임을 확증케 한다. 주님의 사랑에 의한 십자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더 많은 이들이 주의 백성이 되는 일에 몫을 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랑의 실천 몫이다.   주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여 듣는 자들이 주와 합하여 한영을 이루는 거듭남에 초점을 맞추는 정체성을 확증해 준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시어 사단의 일이 멸해지고 주의 것이 된 주의 백성들로 더욱 선을 이뤄가시는 주의 섭리로 승리의 선포이다. 주의 자녀로 회복된 자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새 피조물로서 영생을 누리게 될 주의 것으로 인치심이다. 디모데후서4장6~8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는 신앙의 삶에 유종의 미를 확증시켜 준다. 이를 위하여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명하심이다.   곧 성경은 교육하여 의에 이르게 하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 주의 뜻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후서4장13~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는 확증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대로 진리를 사수하는 자들을 확산시켜 이전보다 더 주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본을 삼게 하심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하신 전도자의 말씀을 살피게 한다. 주의 뜻에 합당히 주의 제자가 되는 일에 몫을 하는 지체들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거듭난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자이다. 주의 영이 있는 자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하고 고난을 인내로 기쁨을 일궈내는 자들이다. 곧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주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그리스도 사신의 몫을 하는 자임을 확증케 한다. 거듭나게 하신 목적이 주를 위함임을 알기에 사랑의 빚 진자로서 많은 이들이 주 날개 아래 들어와 쉴 수 있는 구속사역에 참예임을 확증해 준다. 주 경외함으로 인한 살리움으로, 주의 원하심을 위한 행함이 참 행복을 위함임을......./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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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향유옥합] 인생의 길을 함께 걷는 연습
        “아무개아버님 잘 지냈어요?” “잘 지냈지, 어서들 와”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냅니다.     매주 금요일, 따밥은 노숙인들이 계시는 텐트촌에 방문해 준비된 도시락을 전달하고 한 주간 어찌 지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서로의 안부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긴 인생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렇게 깊어진 관계를 통해 우리는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발견합니다.   따밥(따뜻한 밥차)은 성남시 야탑과 모란, 신흥에 계시는 약120명의 노숙인과 어려운 이웃에게 주일마다 도시락과 한 주간을 살아갈 물품(컵라면, 햇반, 생수, 커피 등)을 전하는데, 한 끼의 도시락을 전하는 걸음이지만, 이 걸음이 쌓여 서로를 향한 친구요 이웃이 됩니다. 그렇게 따밥은 교회로, 비영리단체로 지역의 노숙인들을 위한 삶의 예배를 드립니다.   따밥의 핵심가치는 함께그리고 존중입니다. 따밥은 인생의 길을 함께 걷는 연습을 합니다. 가다가 넘어지면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줍니다. 천천히 가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함께하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며, 함께 가는 길이 외롭지 않고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밥은 이웃의 경계를 확장합니다. 우리 주변의 다양한 이웃, 특별히 소외된 이웃, 노숙인은 우리의 이웃이며 친구입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은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끝으로 따밥은 서로를 존중합니다. 노숙인들의 현재의 삶은 판단 되어질 일이 아니며, 모두에게 있을 인생의 실패와 아픔을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함으로 아프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섬기는 훈련을 해 나갑니다. 이 연습이 무르익어 서로를 감동케할 때 우리는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소개된 사역을 중심으로 따밥교회는 다양한 교회의 모델이 요구되어지는 시대에, 조금은 다른 옷을 입고 세상 속에 복음의 힘과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친구가 되고자 찾아가는 교회입니다. 이 사역이 지속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그리고 지역 교회들과 연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현재 지역의 다섯 교회들이 매주 밥을 짓고, 도시락을 포장하는 일, 또한 후원천사들의 손길이 모여 함께 사역을 연합합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크고 작은 기적들이 필요를 따라 공급되는 일은 물론, 도움을 준다 생각했던 우리에게 내민 노숙인들의 따뜻한 섬김과 용기의 말은 우리의 눈가를 적십니다.   힘든 순간들.....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시간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기쁨과 감사가 우리 안에 고백 되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앞장서 일하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2022년 12월 성탄절 주간, 혹독한 추위에 돌아가신 노숙인분은 저희 멤버들이 정성껏 사랑과 마음을 전했던 분입니다. 매일같이 일기를 쓰며 저희에게 가족도 외면한 인생을 돌보아준다며 감사 인사를 겸손하게 하시던 분이셨는데 그해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 “세상은 혹독하다 그런데 나를 돕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 감사하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이 짧은 글에 멤버들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장례를 치러야 했던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찾은 둘째 아드님은 한없이 울며 저희에게 감사 인사를 건내고 가족장으로 쓸쓸하지 않게 한 노숙인의 삶이 마무리되던 일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런 일들이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 시간과 사건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들입니다.   한 봉사자분이 이야기합니다. “따밥은 성경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써내려가는 듯하다 느낍니다.”   바라기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앞에 돌아서지 않을 용기와 믿음이 우리 안에 자라나기를 그래서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이 부름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따뜻한 밥차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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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건강교실] 눈 건강을 지키는 법 (상)
      최근 들어 일상생활이 온라인, 모바일화 되면서 스마트폰을 통한 근거리 작업이 매우 증가하고, 이에 따른 눈의 피로가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 근거리 작업은 많아지고 황사, 미세먼지 등 환경적 요소도 눈을 위협하는 만큼,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눈이 피로한 시대가 아닐까? 최근 11월 11일 눈의 날을 맞이해 눈 건강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가장 먼저, 정기 검진으로 눈의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안과에서 눈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정기적인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거나 무언가 떠다녀 보인다든지, 물체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든지 등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보는 데 불편한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안과에 방문하여 검사를 받고, 필요시 빠른 치료를 받는 것이 눈의 질환으로 인한 시력 상실과 합병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꼭 증상이 없더라도 고령, 당뇨나 고혈압 등 전신 질환, 녹내장 등 안과 질환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 안과에 방문하여 정기적인 안과 검사를 받아야 한다. 구체적 상황 별 정기 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장에 따라 눈의 굴절 이상(근시, 원시)이 변하는 소아, 성장기 청소년들은 가급적 6개월 간격으로 눈의 굴절 상태(도수)의 변화를 체크하는 것이 좋다.   둘째, 성인도 세극등 현미경 검사, 안저 검사 등 안과 검사를 주기적으로 받는 것이 좋다. 특히, 당뇨나 고혈압 등 눈에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 전신 질환이 있는 경우, 적어도 매년 안저 검사를 포함한 정기적 검사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백내장이나 황반 변성 등 시력을 위협하는 주요한 질환들은 퇴행성 질환으로 노인에 주로 발생한다. 65세 이상에서는 특히 백내장과 시신경(녹내장), 망막 질환 여부에 대한 정기적인 안과 검사가 더욱 필요하다.   또한 안구 건조로 인한 눈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주변 환경이 건조하며 눈에 자극 증상이 잘 발생할 수 있는 가을 및 겨울철에는 안구건조증 예방을 위한 관리가 필요하다. 인공눈물을 주기적으로 점안하여 눈 표면에 충분한 눈물층을 유지하여 안구건조로 인한 증상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건조한 환경이 문제가 되므로, 가습기 등을 통해 실내가 건조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환경적인 차원에서 안구 건조증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다.   눈 깜빡임은 눈의 수분층을 골고루 퍼지게 하여 눈 표면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컴퓨터, TV, 스마트폰의 사용은 눈 깜빡거림을 줄여 눈 표면이 마르게 되어 이로 인한 안구 건조증 증상을 잘 일어나게 한다. 따라서 장기간 사용시에는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눈의 피로를 풀어주거나, 안구 건조증 증상을 느끼는 경우 인공 누액을 점안하는 것이 좋다. 눈물 흘림 혹은 안구 건조증 증상이 심하거나 지속되는 경우, 안과를 찾아 전문의의 검진을 받고 이에 따른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 편에서는 눈 건강에 해로운 자외선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눈에 좋은 음식, 눈 건강을 지키는 생활수칙 등을 전한다. /한양대병원 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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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4)
      그 밖에 7일 동안에 하루를 쉬는 주간리듬, 춘하추동의 4계절 리듬도 사람들의 생활을 규정한다. 여성의 경우 약 1개월을 주기로 하는 생리 주기도 생활리듬의 하나이다.   이같이 빛이나 기온 또는 습도 같은 외부의 물리적 환경이 생활리듬을 규정하나 내분비(호르몬)라는 생체축의 주기성도 생활리듬을 규정한다. 사람의 활동은 밤낮의 변화나 달 또는 계절의 변화에 따르게 되어 있으나 그 주기성은 생체의 생물학적 활동의 주기성과 일치하게 되어 있어 결코 자연현상의 변화만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 생체에는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있어서 생체활동의 변화를 조절한다. 이 시계를 내인성리듬 또는 체내시계라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뇌의 시교차상핵이다. 잠자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송과체에서 분비되는데 1~2시간 이후가 되면 잠이 들게 된다.    이 시계와 환경으로부터의 입력에 의하여 형성되는 생체 리듬의 주기가 환경조건의 주기와 일치할 때, 즉 동조될 때 생체의 내적 환경은 평형을 유지하게 되고 그럴 때 건강한 잠을 자게 되며 따라서 정신도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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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천금보다 귀했다.
      1970년 한강에는 아파트보다 모래가 더 많았다. 후암동에서 이촌동으로 온교회가 출애굽 하듯이 이전을 하고 모래 위에 성전공사를 시작했다. 널빤지와 각목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창문도 못 달아 유리창도 없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바람이 모래를 회오리로 감아올리면 대나무를 꽂아 만든 빨랫줄에 셔츠며 바지들을 하늘로 한달음에 올렸다가 몇 바퀴 돌려서 팽개쳐 버린다. 훨훨 털어도 방바닥에 모래가 우수수했다. 머릿속이며 콧속, 혓바닥, 여기저기 모래가 그득했다. 가운데 큰길을 사이에 두고 교회 건너편에 공무원 아파트가 있었다. 주일 아침 교회 앞 골목길에 서 있노라면 멀리서 한 아이가 길을 건너온다. 아 우리 교회에 오는 아이가 확실하다. 달려가서 번쩍 안고 두둥실 한 바퀴 돌리며 춤을 춘다. 모래벌판 개척교회에서 유년주일학교 학생 하나는 천금보다 귀했다. "오늘은 이촌동, 내일은 세계로" 한강의 기적을 꿈꾸며 새역사를 시작했다. 어느 수요일 유년부 예배를 드리는데 어디선가 연기 냄새가 났다. 마당 뒤쪽에서 유년부 한 아이가 불장난하고 있었다. 뛰어나가 연기 나는 곳에 모래를 붓고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설명하고 단단히 주의를 환기하고 돌아와 다시 예배를 드리는데 이번에는 창문이 훤해지면서 정말로 불이 활활 붙었다. “한번은 용서하지만 두 번은 안 된다. 조금 전 약속 한 대로 몇 대 맞을까 네가 정해라” 눈가에 생글생글 장난기 가득하더니 자랑스러운 듯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 보였다. “그래, 정말 다섯 대는 맞아야겠지만 잘못을 인정한 것 같으니 두 대는 감해주고 세대만 맞자~! 엎드~렷!!!”   감히, 천금을 때리려 막대기를 들었다.   나는 교회 공사장 주변에 널려 있는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깨를 반듯이 세우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손목을 꽉 쥐고 온 힘을 다해서 “따라 해~, 하나앗 !!!” “하나~아 ~” 처음에는 실실 얼렁설렁하더니 한 대를 맞자 아이도 긴장하는 것 같았다. 궁둥이를 바싹 올리고 맞을 준비를 한다. “궁둥이 올리고~ 두울 !!!” “두 우울~~” “자 이제 마지막이다. 다시 올리고, 세엣!!!” “세에에엣 ~” 지금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직 교육전도사님을 모시지 못해서 주일 학교 반사는 나 혼자였고, 예배를 드리던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동그랗게 몰려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을 거야 속으로 다짐하며, 그 자리에서 주기도문을 하고 예배를 마치었다. 기특해서 안아주려 했는데 녀석은 바람같이 사라졌다.   텅 빈 교회에 혼자 앉았는데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매 맞고 화나서 다음 주일 교회 안 오면 어쩌나... 너무 심하게 때렸나...주일학교 유년부 여자 선생이 몽둥이로 학생을 때렸다고 소문나면, 당회장 아버님 목사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맘 졸이며 사흘을 끙끙 앓았는데 주일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가 들어 왔다. 멀리서 빙빙 돌다 슬쩍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는 서로 씽끗 웃었다.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미안해 아팠지? 다시 와줘서 고마워... 53년이 지났다 지금은 헌신 봉사 충성하시는 60세 초반 장로님이 되셨겠지.   '한강의 기적처럼 다시 뵙고 싶습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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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4
  • [변두리 소수자⑧] 마음건강
      요즘 여러 나라에서 인종갈등과 차별문제 등으로 인한 부당한 일과, 심지어는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공존을 위한 긍정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좋은 시민들이 함께 좋은 노력을 할수록, 좋은 사회를 이뤄서, 나와 내 가족도 그 좋은 사회에서 함께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분위기가 험악하면, 시민들도 각박해 진다. 특히 타 인종과 타 문화권의 사람들과 갈등이 심해진다.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과 개인적인 습관, 표현하는 모습 등을 부정적으로 받는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다(Victim Mentality). 상대방의 평범한 시선을 의도적인 비하로 판단하기도 한다(State of Mind). 그러나 어떤 경험도 성장하는 기회로 삼는 마음을 갖도록 훈련이 필요하다(Falling Forward). 한국 사회는 그런 면에서 이전보다 많이 좋아진 듯하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들도 좋은 시민이 되면 좋겠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나의 이민 생활과 학업, 사역을 통하여 배운 경험들을 나누고 있다. 그들의 정서와 정체성이 건강하게 훈련되어, 이 사회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잘 살아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또한 그들의 시민의식이 건강해야 이 사회가 평안해 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첫 해에 경험한 일이다. ‘Jafco’라는 전자제품 백화점에 가서, 사용하던 전자시계의 건전지를 바꿔달라고 점원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 백인 여성은 나의 발음을 흉내 낸 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한 중년 신사가 오더니, 그들에게 비켜달라고 한 후 내 앞에 서서,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진열장 안의 모든 시계들을 보여 주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했다. 그 분은 그 백화점의 당시 책임자였던 것 같았다. 그 분은 직원이 고객에게 잘못을 했으니, 대신 사과하고 보상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분에게 ‘나는 지금 시계의 건전지를 바꾸려고 왔으니, 그렇게만 해 주면 된다’고 말하자, 그는 손수 내 시계를 열고, 건전지를 바꾸고, 세척까지 한 다음, 정중하게 서서, 상냥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시 사과를 하였다.   이 일은 당시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내 마음을 잘 지키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값진 승리였다. 이후의 이민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마음 대신 좋은 사람과 기억을 마음에 담는 선례가 된 것이었다.   콜린스 영어사전과 대부분의 사전은 이런 ‘마음 상태’를 ‘특정한 순간’에서의 내 기분과 정신 상태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마음 상태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예시했다.    “I want you to get into a whole new state of mind.” 때에 맞는 새 마음으로 나를 늘 조정해야 한다. 마음에 있던 상처와 피해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상대의 의도를 왜곡할 수 있고, 불신을 깔아 놓고, 남을 대하면 도리어 피해를 줄 수 있다. 나는 소수자, 피해자, 연약자의 입장이니,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저항하고, 권리를 주장하면 상대편은 공연히 매도되는 억울한 입장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갑질 못지 않은 ‘을질’의 저지름이 되는 것이다. '피해의식'은 나쁜 경험으로 인해 두려움과 거부감이 마음에 자리잡는 동안, 그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면, 그로 인해 인생의 어느 때에, 부정적인 거부감, 방어의식, 분노, 불평, 불만 표현으로 ‘피해자’ 입장을 정당화하며, 책임의식도 약해진다. 마음에 있는 부정적 에너지를 표출하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피해자 입장의 자기 요구를 ‘정당한’ 권리라 생각하고 투쟁하는 동안,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으니 그야말로 아픔을 사회에 악순환 시키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동남아 국가의 어느 민족단체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에 이런 이슈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수업을 마치기 전에, 공부 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젊은이들이 이해 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내가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의 입장으로 오래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한 방법을 소개하고 나누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백화점에서의 경험을 했던 청년시절에 내 마음을 지키려고 했던 한 습관이었다. 당시 나의 좌우명격인 말씀을 손수 크게 써서, 내 방 문지방에 붙여 놓고, 외출하기 전에 복창하였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사회에서 각 개인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고 대한민국이 더욱 강건하길 소원함으로 기도한다.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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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0
  • [당신의 뇌] 뇌를 알면 수면이 보인다 (3)
      렘수면은 신체는 잠자고 있으나 꿈을 꾼다거나 안구가 움직이는 등 뇌는 깨어 있을 때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렘수면은 깨어날 준비 상태라 할 수 있어서 깨우면 쉽게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48시간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정상적인 뇌 활동이 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게 된다.   그러면 왜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신경세포는 다른 신체조직의 세포와 달라 일단 망가지면 재생될 수 없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잠을 잔다는 것은 뇌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잠을 자지 않는 동안에도 뇌파의 기록을 보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수면뇌파가 기록된다. 이를 미세 수면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뇌는 적당한 수면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보통 7~8시간의 수면이 적당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수면이란 필요에 따라 가감될 수 있어서 엄격하게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처해진 환경에 따라 각각 정해진 범위의 리듬생활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휴식을 취하는 1일의 리듬생활을 한다. 즉 명암의 빛 리듬에 동조하는 생활을 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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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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