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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산나] 코로나는 메시아 재림 예언의 성취 (1)
      오늘의 ‘코로나’는 교회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는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섭리를 주의-주목하게 된다.    무엇보다 2000년 교회사에 예배를 방해했던 세력들은 어디까지나 사단 그 자체, 또는 사단의 노예인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코로나는 하나님의 직접 섭리이다. 왜냐하면 질병 자체가 인간의 범죄의 결과이고(창 3:17~18),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의 징벌을 “전염병으로 7만 명의 백성이 죽게 하신”(삼하 24:15)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관심은 다윗왕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인구 숫자’(삼하 24:1)를 헤아렸다는 것으로 향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의 병력 숫자를 점검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스라엘은 여호와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거룩함’(레 11:45)에의 요청 때문이다. 오늘의 코로나는 말세지말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소위 ‘비대면 예배’를 강요당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교인 머릿수 통계’중단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한 경고다.    이에 대하여 계시록 12, 17장은 저 물량주의의 잘못을 “물위에 앉은 큰 음녀”라고 지목, 예언해 주셨다. 이 때에 ‘물’이란 곧장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계 17:1~15참조)고 귀띔해 주신다. 이어서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이 말씀 중에서 1절에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란 먼저는 중세 및 오늘의 천주교회, 특히 ‘교황청 및 교황’이다. 예컨대 2013년 광복절에 방한한 프랜치스코는 세종로 거리에 30만(필리핀에서는 800만)군중을 운집시켰다. 한편 위 말씀 중 ‘여자의 자주 빛 붉은 빛 옷’은 오늘의 가톨릭의 신부들의 미사 집전 예복을 지목한 예언의 성취다. 물론 옷 색깔 자체의 뜻보다는 중세로부터 오늘까지의 가톨릭이 과시하는 종교 및 세속적 권위, 특히 위에 말한 교황의 ‘물위에 앉은 음녀’로서의 빗나간 교회(corrupted church)의 저것을 지목-예언하심이다. 물론 이 같은 교회풍토에서 위에서 예를 든 개신교가 제외가 될 수 있을까?    이에 알 것은, 신구약 66권의 말씀을 직접 계시 받은 선지자들은 절대로 예외가 없을 만큼 ‘물-군중’과 극과 극의 ‘광야에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가 누리고 있었던 당시의 온 세계를 호령하는 바로 왕궁의 저것은 오늘의 대통령, 국가 원수가 정도가 아닌, 저 솔로몬 왕의 영화와 비견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저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돌진했다. 이것이 없는 선민 이스라엘의 탄생 자체는 상상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모세가 십계명을 계시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군중-물’로부터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었다. 특히 저 모세의 ‘광야’의 절정은 홍해를 건넌 직후 ‘신 광야’에서였다. 이 같은 예언자-선지자로서의 특권인 ‘광야’의 선결 조건은 엘리야도, 다니엘도,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예수 메시아께서 친히 저 ‘광야’의 극치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다. 십자가 위에 메시아께서는 동족-군중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마저 버림받고 있었다. 물론 이는 인류 역사상 절대로 재연될 수 없는 모순(contradictory)이자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의 예수 메시아께서는 곧장 유일절의 여호와 하나님과 본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말 것은 예수 메시야의 저 ‘광야에의 고독의 극치’가 인류를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자체였다는 것이다. /기성측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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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1
  • 종교인 세금에 관한 모든 것(1)
      문 1. 교회 등 공익법인인 출연(기부)받은 재산을 매각하는 경우에는 매각금액을 매각한 날이 속하는 사업연도의 종료일로부터 1년내 30%, 2년내 60%, 3년내 90% 상당하는 금액 이상을 직접 공익목적에 사용하여야 합니까? 답) 매각대금은 직접 공익목적에 사용하여야 합니다. 사업연도 종료일부터 1년내 30% 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가산세, 2년내 60%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가산세, 3년내 90%이상 미달사용시 미달사용 비율만큼 증여세가 부가됩니다. 문 2. 교회가 정기예금을 하였다. 이자소득세 환급절차를 알려주세요. (영리사업 없이 비영리사업인 종교단체일 경우) 답) 교회의 이자소득은 예를들면 201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교회가 정기 예금한 은행으로부터 「원천징수영수증」을 발급받아 2020년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법인세 신고를 관할세무서에 제출하여 이자소득세를 환급받는다. 환급받은 이자소득세는 3년 이내 종교 고유목적사업에 사용하고 지출영수증을 발급받고 세무서에 신고 제출한다. 경기도 모 교회는 정기예금 이자소득세 약 3천만원을 환급 대행하고 있다. 울산, 포항, 대구, 전주, 대전, 속초, 인천, 서울의 교회의 이자소득세 환급 신고를 하였다. 문 3. 교회의 부동산을 3년간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한 후에 타인에게 임대하였다. 교회에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해마다 재산세는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교육관으로 3년간 사용하였다면 교회에서 취득시 감면받은 취득세는 추징되지 않으며 타인에 임대한때부터 해마다 재산세가 과세됩니다. 문 4. 교회의 경외에 교인 및 교회용 무상 주차장을 설치하여 운영합니다. 교회로 직선거리 300m 이내에 설치한 주차장과 도보거리(골목거리) 600m이내 설치한 교회의 무상 주차장은 취득세와 재산세, 종합부동산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차량, 교인들의 예배참석차량, 인근주민에 무상주차하는 차량의 주차장은 취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가 비과세 됩니다. 문 5. 교회의 교인수송용 차량과 담임목사의 선교용 차량에 대하여 자동차 취득세, 자동차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의 모든 차량은 과세됩니다. 문 6. 교회로부터 인접된 토지의 담장을 철거하고 1구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답) 교회로부터 직선거리 300m이내와 골목거리 600m이내 소재하는 교회의 무료주차장은 취득세와 재산세가 비과세 됩니다. 문 7. 교회 담임목사의 종교용 주택을 2년간 종교용에 직접 사용한 후 제 3자에게 임대하고 새로이 취득한 주택은 취득세가 과세됩니까? 답) 2년간 종교용 담임목사의 주택은 취득세 추징 과세됩니다. 문 8. 은혜교회는 유치원을 건축하고 원아들에게 유치원 교육비를 받고 운영합니다. 주일에는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무상으로 교육하고 예배드립니다. 취득세와 재산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유치원은 종교고유목적사업이 아니므로 취득세, 재산세가 과세됩니다. 문 9. 교회가 불우노인 복지사업을 하기 위하여 교회 직원회의 결의로 유료 양로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취득세, 재산세와 양도시 법인세가 비과세 됩니까? 답) 교회에서 불우노인 복지사업을 위하여 유료 양로원을 운영할 때 취득세, 재산세, 양도시 법인세가 과세됩니다. /세무사·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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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1
  • [건강교실] 현기증 (3)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약 의존이 증가할 수 있어 장기간의 사용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고, 이 외에도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이나 교통사고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특히 작용시간이 긴 약제는 현훈에 효과적이지 못하며 벤조디아제핀 계열에 과민증의 기왕력이 있거나, 치료되지 않은 녹내장, 중증 근무력증, 간·신기능장애자, 그리고 임산부와 수유부에는 금기이며 호흡기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주의를 요한다.   항콜린제제는 무스카린성 수용체에 작용하며 움직임에 대한 내성을 증대시킨다. 또한 전정기능의 보상작용에 영향을 미치며 최후영역과 망상체에 있는 무스카린 수용체에 아세틸 콜린과 경쟁적으로 작용해 항콜린작용을 나타낸다. 특히 항 콜린제제는 중추기전이 중요하므로 뇌 혈관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항콜린제는 멀미에 효과가 없고, 증상이 시작된 후 투여하여도 효과가 없다. 이 성분을 포함한 약제로는 스코폴라민과 아트로핀이 있는데 과거에는 경구적 투여가 시도되었으나 입마름, 졸림 등의 부작용이 심해서 요즘에는 경피 패치를 통하여 귀에 부착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약제는 시간당 5㎎씩 흡수되며 3일 이상 지속적으로 혈중농도가 유지되므로 멀미의 예방에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투여 후 4~8시간이 지나야 적정 혈중농도에 도달되며 순수한 항콜린제제는 증상이 생긴 후에 투여하면 효과가 없으므로 짧은 현훈증에는 유용하지 못하다.   중추적으로 작용하는 항히스타민제제는 대부분 항콜린 작용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멀미를 예방하고 일단 증상이 생긴 다음에도 정도를 완화하는 효과를 갖고 있으며, 현훈증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여러 종류의 항히스타민 수용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H2 수용체가 주로 관여하며, H1 수용체 차단제는 현훈을 막는 데는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H3 수용체 효현제가 H2 수용체 차단제와 같은 결과를 보이며 또한 대부분의 항 히스타민제제는 칼슘 채널 차단 효과 같이 갖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속하는 약제로 메클리진, 시클리진, 디멘히드리네이트 등이 있다.   메클리진은 화학 수용체 발통대를 억제하여 중추성 항콜린작용을 나타내며 중이 미로의 흥분성을 억제하고 중이 전정기관-소뇌 전달 체계의 신경전도를 억제한다. 임상적으로는 멀미의 예방 및 치료, 전정기관의 이상에 의한 현훈 치료에 사용된다. 효과 발현시간은 경구 투여 시 1시간 이내이며 작용시간이 길어 8~24시간 지속된다. 현훈시 복용 용량 1일 25~100㎎을 경구로 분할 투여하며, 멀미의 경우는 12.5~25㎎을 여행 1시간 전 투여한 후 12~24시간마다 반복 투여하고, 필요시 50㎎까지 증량이 가능하다. 또한 태아 기형에 대한 위험이 낮아 임신 중 어지러움에 1차 약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1~2주간 치료하여도 현훈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투약을 중단하는 것이 좋다.   흔한 부작용으로는 중추신경계에서는 경증도의 졸음, 그리고 호흡기 계통에서는 기관지 점액의 분비 증가가 있으며, 빈도는 낮지만 관절통과 식욕 증가, 체중증가, 오심, 설사, 복통, 구갈 등의 위장관계증상과, 그 외에도 두통, 피로, 신경과민이 생길 수 있다. 본 약물에 과민성이 있는 경우나 임신한 경우는 금기이며, 협우각 녹내장, 전립성 비대증, 유문-십이지장 폐쇄, 방광경 부 폐색의 경우에는 주의해서 사용해야 하고 특히 기온이 높은 날이나 운동 중 사용 시 주의해야 한다.   디멘히드리네이트는 오심, 구토, 멀미와 관계된 현기증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우선적으로 사용되며 메니에르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서도 사용된다.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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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1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35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크고 작은 짐을 결코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눈에 결코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행복의 지수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 선택한 것 중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세월이다. 어릴 때는 시간이 빨리 가지 않는다고 느낀다. 아마 한번쯤은 나는 언제 어른이 되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그 시간을 잡고 싶을 정도로 빨리 날아간다. 30대는 30km, 40대는 40km, 50대는 50km, 그 이상의 시간은 더 빠르게 달려간다.   사람들이 제각기 다양하게 살아갈 때,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 10년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의 세월 속에서 누구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 삶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을 아끼며 주어진 세월 속에서 어떤이 와의 만남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영위해야 한다.   『이방인(L’etranger)』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인생에서 중요한 짐을 네 가지로 말했다. 사람은 그 짐을 지고 고생하며 살아간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첫째는 ‘경제적인 짐’이다.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 물질을 가지고 꿈을 이루기 위해 투자를 한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맡으므로 경제적인 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는 ‘정신적인 짐’이다. 경제적인 짐이 해결되었다고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는다. 삶 속에 더불어 살지 않고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고독이 온몸을 누른다. 그 스트레스를 통해 우울감과 우울증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 갈등과 번민이 끊이지 않고 존재한다. 사람이 고독감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생(生) 자체의 짐’이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자체가 짐이라는 것이다. 갓난아이로 태어나 부모의 보호 속에 이웃을 만난다. 그 성장 기간을 통해 많은 실수와 더불어 발전하여 성숙한 모습으로 되어 간다. 그렇다고 마냥 부모의 슬하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힘겨운 삶을 영위해 간다. 그 일생 자체가 짐을 안고 살아가기에 고통의 연속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짐’이다. 육체가 건강하다 하여 영이 건전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나야 건강한 영이라 할 수 있다. 죄악 된 영이 그대로 있으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악한 영이 인간을 이끌고 간다. 그래서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과 만나야만 한다. 그 만남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간에게 주셨다.   이 땅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에게만 영을 주셨다. 하지만 에덴 동산에서 그 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어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영적인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이 육과 영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한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지금, 여기,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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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30
  • 정성구박사 칼럼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앞으로 지금 쓰고 있는 100원짜리 동전이 없어질 듯하다. 그 이유는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상이 친일화가인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기 때문에 폐기한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친일화가인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는 이유로 그것도 뜯어내서 폐기했다고 한다.   정부가 의논해서 결정한 것을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겠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그가 한국 화단의 훌륭한 화가였던 것도 맞고, 또 일제시대 때 조선민전에 출품하여 입선작상을 받은 대표적 화가로 알고 있다.   그 화가가 구체적으로 무슨 친일행각을 했는지는 일반인들에게 자세히 알려진 바도 없다. 혹시 그냥 모 단체에서 만든 친일인사 명단에 장우성 화백이 있으니 친일청산의 차원에서, 그의 작품인 이순신 장군상을 공식영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새로운 영정을 만든다고 들었다. 그것은 친일 청산이라기 보다 일종의 문화혁명이다. 들리는 말로는 그분 말고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화패에서 사라질 것 같다. 혹시 이러다가 화패개혁을 하려는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면 지금의 시청본관도, 서울역 청사도, 한국은행 본사도 헐어야 되지 않겠는가?   사실 누가 이순신 장군을 친히 본 사람도 없고, 현재는 그의 사진도, 그림도 없고, 그의 생김새를 글로 나온 것도 없는데, 당시 작가가 이순신 장군상을 그릴 때는 많은 글들을 참고 했을 것이고, 작가의 영감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1750년대 곧 18세기 중엽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그림을 하나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동아대학이 사본을 하나 가지고 있다고 들었지만, 내가 입수한 작품은 미국의 동부 볼티모어(Baltimore) 시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사본으로 가지고 있다.   「忠武公 李舜臣」이라는 영정에는 당시에 굵은 삼배 같은 천에다, 노랑 배경에 흡사 징기스칸을 닮은 무인형으로 그려져 채색되어 있다. 아마도 이순신의 모습이 흡사 세계 제패를 꿈꾸던 몽고의 징기스칸을 닮았을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한 모양이다.   당시 그 화가가 누군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그 시대에 이순신장군에 대해 최선을 다해 그렸을 것이다. 그는 친일파가 아니었고, 친미나 친중도 아니었고, 연대도 이조 중기에 그렸으니 이순신 영정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술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비판 하는 것은 모두 사회주의, 공산주의 숫법이다. 나의 스승이요, 20세기 칼빈주의적 미술사의 최고봉이었던 화란 뿌라야 대학교 교수였던 한스 로끄마꺼(Hans Rookmaaker)박사의 말이 생각난다. “예술에는 중립이 없다!”고… 예술 작품에는 반드시 그 작가가 가진 사상과 세계관이 들어 있다.   그런데 장우성 화백의 작품에서 일제를 고무, 찬양하는 것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글을 통해서 어떻게 친일을 했는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친일 척결을 하는 것도 혹시 무슨 정치적, 또 무슨 사상적 의도가 배후에 깔려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일제 식민지 시절에 친일을 안한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까? 심지어 독립유공자 가운데도 친일파가 있다고 들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와 박관준 장로를 비롯한 한상동, 이인재, 손명복 목사 등 산 순교자들과 해외에 나가서 일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신사참배를 피해서 해외에 망령 한 인사들만이 지조를 지켰고, 나머지 조선사람은 전부 친일파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 영웅이자, 자부심인 마라톤의 영원한 영웅인 손기정 선수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나는 1936년에 독일 베를린 올림픽 경기에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 당시 독일에서 인쇄된 칼라사진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시상대에 올라가 붉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올라 섰었다. 나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손기정 선수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우리의 영웅으로 언제나 가슴에 남아 있다. 그 옛날 동아일보 기자가 흑백사진에 나온 일장기를 지워버리려고 밤에 몰래 조판실에 침입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84년이 지난 지금 붉은 일장기를 단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친일파로 몰아갈수는 없다.   나라를 잃은 그 시대에 그는 가슴에 붉은 일장기를 달았지만, 생명을 걸고 조선의 건아로서 뛰고 또 뛰어 월계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본국적이었다.   앞으로 두고 볼 것이다. 새로운 이순신 장군 영정을 그리는 화가가 혹시 종북 화가가 아닐는지, 또는 중국을 지독히 좋아하는 친중 화가가 아닐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화가가 아닐는지,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정치, 경제 뿐 아니라 예술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100원짜리 동전이 다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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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3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34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섬나라 일본제국이 대륙을 점령하고자 한반도와 간도지역에서의 만행들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일제잔재들이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다. 금년이 일본제국에서 해방 된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생각하며 영화 ‘동주’의 주인공들인 저항 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를 기억하고 그들의 삶의 여정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17년 동년에 지금의 중국 연변자치구 용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25년 4월, 8살이 되는 해에 윤동주, 고종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하였다. 그들은 총명하고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서 범사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동학들 중에서 나란히 리더들이 될 정도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소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사상교육을 받았다. 특히 그들은 학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러 애국정신을 높였다. 매우 탁월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들은 용정시 명동촌에서 십리 이상 떨어진 화룡시에 있는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였다.   은진중학교 3학년 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시던 민족주의자 명의조(名義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송몽규는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결단을 하게 된다. 그는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 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 주석의 지원하에 한국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 선생님이 반일민족독립 전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운영되었던 학교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훈련하여 학생들을 인도, 조직하고 문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38년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민족정신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익혀나가는 열매를 얻게 되었다. 1942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2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송몽규는 교또재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윤동주는 도쿄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말살정책을 비난하여 1943년 7월에 <도쿄조선인학생 민족주의집단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당했다. 그 해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공포되고 일괄적으로 징용령장이 발부되었다.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도쿄대학에서 재학 중이던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7월 14일) 도쿄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윤동주의 죄명은 <독립운동>으로 2년 언도를 받고 규슈후까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 같은 죄목으로 송몽규도 2년 언도를 받았다. 윤동주는 고향집에서 보내준 <신약성경>을 옥중에서 읽었다. 방부제 주사를 매일 맞았던 그들은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시체 해부를 위한 주사)으로 시달리다가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광복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1945년 2월 16일에는 윤동주 사망하였고, 3월 10일에는 송몽규가 옥사하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분투하였으나 청년문사 송몽규와 저항시인 윤동주는 일제당국의 무단적인 폭압에 비참하게 희생되었다. 한 줌의 재가 된 윤동주와 송몽규는 고향의 품인 간도 용정시 묘소 서쪽에 묻혔다.   지금까지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조명해 보았다. 생애 자체가 처절한 일제 강점기의 중심에서 그들의 나라사랑과 가슴 아픈 최후를 기억한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짧은 생애를 살았던 고귀한 발자취를 반추하며 추모한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날 그들을 잊지 말고 각자의 생활 속에서 국가를 사랑하자. 아울러 두 분의 삶을 교훈 삼아 작금에 처해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어두운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며 살아가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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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3
  • [호산나] 사랑의 하나님
    한국과 미국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와 사랑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위한 구호를 정당화하는 일에 소비될 뿐이다. 기독교에 큰 기대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로 사회를 분열하고, 악의적인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일들을 주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석하게 성경을 믿는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성경 자체가 너무 두껍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더구나 서로 상이한 시기와 장소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기본 정서를 가진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을 믿는다는 이 말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다양한 만큼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이 그리도 어려운 이야기인가. 성경은 언제나 해석의 문제에 부딪히고, 해석은 언제나 해석자의 상황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그 단순한 이야기조차 기독교인들과는 서로 공유될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리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서는가. 미국의 대선이 마치 우리나라의 선거인 양, 기를 쓰고 부정선거를 외치는 이들의 정신상태를 도대체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나에게 매우 유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일탈에 어떤 심각한 이론들을 들이대며 고민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가 보기에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반-상식, 반-사회적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보다는 그 이전에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지금의 극우 개신교인들에게 천벌이 있어야 마땅하다. 언제나 타인을 공격하며, 자신의 무지는 알지 못한 채, 미천한 사유로 타인을 가르치려 드는, 그것도 자신들이 그 위대한 진리를 알고 있다며 선전하는 그 태도. 정의로운 신이 살아있다면 분명 그들의 행동에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들의 행동을 더는 두고 보지 않고 일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확신한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집단적 무지와 욕심으로 똘똘 뭉친 그 집단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내하시고, 또 언제나 참으신다. 교회를 향한 사회적 분노는 커져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온화하시다.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온갖 선동질을 해대는 기독교인들의 기고만장함도 참으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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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쉽게 배우는 한의학] 아토피성 피부염(5)
      면역기능 회복에 주안점두는 치료법이 기본 환자와 한의사 사이 신뢰감이 무엇보다 중요   한방의 아토피 치료는 근본적인 원인의 제거에 목표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을 각각의 한의사가 서로 다르게 파악하여 백가쟁명식으로 난립하여 치료하는 것이 문제다. 장기(臟器)적으로는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의 오장(五臟) 중에 한의사마다 주안점을 두는 장기(臟器)가 다르며, 따라서 치료법도 각각 다른 것이 문제다. 한의학적인 치료 방침은 청열해독법(淸熱解毒法)이나 면역기능에 주안점을 두는 부정거사법(扶正去邪法)이 기본이고, 상기 조건에 맞는 한약을 복합적으로 처방해서 치료하며, 근래에는 발효 한약을 응용하기도 한다.   한방 치료의 보조요법으로는 침(針)과 뜸 외에 한약이나 식물에서 추출한 외용제를 사용하기도 하며, 회피요법도 응용한다. 또한 환자 개개인의 체질을 구분하면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치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원별로 각기 서로 다른 처방을 사용하고, 동일한 한의원이라도 각각의 환자마다 다른 처방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이 치료율을 떨어뜨리고 치료율의 통계를 발표하기가 어렵게 만들며, 때로는 잘못된 처방으로 인하여 아토피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대개의 환자들은 이미 스테로이드를 과다하게 사용하여 거의 중독 상태로 내원하는데,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사람은 치료 초기에 진물을 포함한 증상이 다소간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스테로이드제제에 의한 일종의 약물 중독 상태임은 인정하지 않고 이 탈스 과정의 기간을 참지 못하고 중단하면, 한방 치료에 대한 나쁜 기억만을 갖게 된다. 한약으로 아토피가 호전되면, 혹자는 감초(甘草)가 스테로이드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감초(甘草)의 스테로이드 효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감초(甘草)가 함유하는 성분은 일반적인 서양의학에서 사용하는 스테로이드와는 다르며, 만약 감초(甘草)의 스테로이드 성분이 아토피를 호전시킨다면 대부분의 한의원에서 감초(甘草)를 열심히 달여 주면 아토피는 어느 한의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질병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대부분의 한방 치료는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치료 과정 중에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면서 환자가 가려움증으로 고통을 받아가며 서서히 치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간의 치료기간을 필요로 하고 환자와 한의사 간의 서로 믿고 기다리는 신뢰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로 아토피를 치료함에 있어 스테로이드제제의 사용 여부에 따라 치료반응과 기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나타난다.   또한 질병의 치료는 의료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환자의 몸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의료인은 질병의 치료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인도자일 뿐임을 알아서 스스로 생활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원하는 치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아토피를 치료하다가 보면, 인체의 모든 부위가 동시에 같은 속도로 치료되는 것은 아니고, 치료 회복 속도가 빠른 부위와 늦는 부위가 나타난다. 증상의 심화 정도와 개인적 성향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증상의 악화 정도가 비슷하다면 하체(下體)보다는 상체(上體)가 빠른 효과를 나타내며, 몸통 부분이 가장 먼저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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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목회자 칼럼] 성공적인 생애를 살라
      ‘멋진 인생’ 알 만하면 끝나는 것이 있다.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청춘과 축제이지만 흐린 하늘과 눈물이기도 하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없지만 우리는 태어났고 훗날에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켜켜이 세월이 쌓인다.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처럼 사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 인생만큼은 그럴 수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고유하다. 인생은 쉬지 않고 달려간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어느새 시간은 지나가 버린다. 이런 생각을 귀찮게 여기고 하루하루를 무관심하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살고 죽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 선한 일을 이루기를 꿈꾼다. 하나님이 허락한 인생을 헛되이 살고 싶지 않는다. 우리는 위대한 삶을 위해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시련의 때에 변화와 소망을 선택할 수 있다.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선한 일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다. 기억하자. 위대하신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평생을 사는 동안 성공적인 생애를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세상은 더욱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됩니다. 선거철 때마다 치열한 후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가 문제이다. 어제의 성공한 사람이 오늘에 와서는 곤경에 빠지게 되거나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그의 생애가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요셉이 체험한 성공의 자리를 보자.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었고,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요셉은 성공적인 일로 인해서 신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노예에서 가정 총무가 되었고 가정 총무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감옥에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어느 영화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사실이요. 언제든지 체험이 가능한 일이다. 요셉의 성공적인 일에서 주는 교훈이 있다. 이 성공을 위해서 많은 연단과 시련을 이겼다. 기독교인은 이 시련과 연단을 이겨야 한다. 이 성공이 올 때에 사람을 잘 만나게 되었다. 물론 사람을 잘 만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이 요셉의 성공한 가장 큰 열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적인 생애를 살아야 한다. 언제나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데 그 꿈을 잃지 않았다. 그 꿈이 이룩되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방해하기도 했다.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다. 감옥에도 가게 되었다. 그래도 그 꿈은 변치않고 간직하게 되었다. 요셉은 성공할 때까지 인내하는 사람이었니다. 인내가 중요하다. 인내하면서 매사에 성실한 그의 삶이었다. 성공한 음악인, 예술인, 운동경기하는 선수, 과학자, 수많은 경제인들의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 간증을 듣게 된다.   우리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요셉이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다. 창세기 37~50장까지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요셉의 신앙에 대해서 무려 12번이나 할애했다.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을 중심한 생애였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결을 지켰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이겼다. 남을 용서하는 신앙 가운데 살았다. 형제들도 용서하고 보디발 신하도 용서했다.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외로울 때도 외롭지 않았다. 에녹, 엘리야, 요셉을 보자. 언제나 하나님과 통했던 사람들은 성공적인 생애였다. 믿음의 선진인 요셉에게서 성공적인 생애를 배워야 한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신앙의 정상에 서기를 바란다.   /나돌섬선교회 대표,  파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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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성령’과 동행하는 새 날들 7]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관
      주께서 새 언약으로 회복하시어 견인해 가시는 거듭난 자들은 창조의 목적대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여정으로써, 주를 위하고 주에 의하여 지체의 몫에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거룩한 제자들로 확장이다.   곧 에베소서1장 18~19절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의 의미를 알고 그 뜻대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주 사랑하는 지혜 자들로 회복이다.   마땅히 주를 본받아 위엣 것에 소망을 두고 성령과 동행하여 마귀의 일이 멸해지게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 존재의 목적이기에, 주님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그리스도 사신의 직임을 온 맘과 목숨을 다하여 승리하는 자들로 세움의 가치이다.   데살로니가2장2~4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대로 오직 섬김에 존재의 가치를 둔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복음을 위하여 내놓는 것은 지극히 주를 사랑하는 일에 당연하며 제자화를 펼치게 하시는 주의 능력을 힘입은 믿음으로 감동의 행보임을 증거 한다. 2장8절참조   이와같이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관은 이를 본받아 주의 뜻을 품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도록, 성령과 동행하여 주님의 원하심을 기쁨으로 회복해 가는 성화로 순종하는 여정이다.   주께 사랑의 빚을 진 종들로 주신 사랑이 너무도 귀하고 크다는 것을 알기에 제자화에 소명을 갖고 합당히 온 몸과 목숨을 다해 드리길 소원하며 좇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주의 말씀은 빛이 되어 강한 힘과 돈독한 믿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산 자의 몫에 선한 열매들이 맺혀 주의 기쁨이 충만한 견인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 새기게 한다.   바울사도의 애씀과 헐벗음과 수고함과 자지못함과 감옥에 갇힘과 굶고 매 맞고 겪은 모든 고난들은, 복음을 듣고 돌이켜야 할 다른 무리에 있는 양들이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존재의 목적이기에 주의 마음으로 채워져 가는 성화의 가치관이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얻은 자로서 제자 화하는 일에 자신을 힘써 드리는 신앙은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사랑의 실천으로 화답하는 믿음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주를 더욱 사랑하여 복음을 듣는 자들이 교훈을 좇아 구원 얻는 자의 수가 날마다 많아지도록 말씀에 순종으로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동행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믿음의 성화로 확장되는 제자화는 ‘주의 멍에는 쉽고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일이 아니라’는 말씀에 아멘 화답할 수 있는 주의 능력의 나타남이다.   곧 부르심에 합당한 가치관의 행보는 주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는 성화의 날들로 감격의 새날들임을 확증해 주신다. 저희로 하나 되길 원하시는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오이코스대학 객원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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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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