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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이중직 문제 고민해야 한다
    목회자의 수에 비해 목회자에게 안정적인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교회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생계가 보장되는 교회가 아닌 작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나머지 목회자들의 생계는 심각한 위험을 받고 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그 가정이 겪고 있는 심각한 생계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문제여서 더욱 안타깝다. 먼저 가장 중요한 목회자 수급조절에 모든 개신교단은 완전히 실패했고, 개신교단은 이미 만들어낸 목회자의 생계를 전혀 책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급조절에 실패한 한국 개신교에 여전히 훌륭한 자질과 성품을 갖추고 있는 다수의 목회자들이 활동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목회자로써의 자질과 성품을 갖추고 있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본이 되며 영향력을 끼치기보다는 변방으로 밀려났고, 세습이나 연줄 등의 고리를 이용해 큰 교회를 차지한 애꿎은 목회자들이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것도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주도하는 한국교회는 사회의 온갖 질타를 받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고, 기독교 생태계는 말 그대로 척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는 목회자 가정이 한둘이 아니다. 교단이 목회자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면, 적어도 목회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은 막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은 주님의 길을 걷고자 선택한 이후 사역의 길에만 집중한 탓에, 세속에서 직업을 얻어 살아가고 있는 것에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한국 개신교는 목회자들을 위해서 진지하게 이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수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나 세속에서나 너무도 값진 인재들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 지금은 목회자 이중직 문제가 타당한지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목회자들이 다양한 직업군에서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도 목회를 병행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이것은 수많은 목회자 가정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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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9
  • 진정한 교회연합과 일치를 이루자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수한 복음이 사라지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다. 세계교회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순수한 복음이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로 인한 악영향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라오디게아는 ‘백성을 기쁘게 하다’는 뜻인데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현대교회의 모습을 반영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와 기복주의, 성직주의, 복음실종, 제왕적 목회자의 음행과 부도덕, 주술적 성령운동 등으로 표면적으로는 영혼구원을 외치고 있으나 참 교회의 모습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에베소서 1장 22~23절). 교회는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서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체요, 몸이다. 교회는 만물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합된 한 몸이며 일체가 된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다스리며 보존하시는 모든 섭리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건전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전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증거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확증하는 곳이며, 그것을 위해서 성경 진리를 선포하는 곳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연합과 일치를 위한 패러다임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광야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면서 교회를 방해하는 위험요소에 대처해야 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장 8절). 우리는 과거 그리스도인들이 목숨보다 아끼고 지켰던 기본교리, 즉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하나님의 교회의 중요성, 교인의 성화와 성숙,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등 진리를 지키는 데 연합과 일치의 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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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1-19
  • 추수감사절의 의미 상기하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감사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행사, 곧 하신 일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함이요, 진리로 구원하시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인의 감사 이유가 죄로부터 성별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씀하면서 ‘죽음 이후에도 새 생명으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기보다는 믿음으로 살게 하고 어려움 중에서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타심을 발휘하게 하며 환란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쁨으로 견디게 한다. 이것이 추추감사절의 시작이요 의미이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정착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으나, 기후와 환경에 맞지 않아 첫해에 질병과 기아로 102명 중 47명이나 사망했다. 이듬해인 1921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콩, 보리들을 재배할 수 있었고, 이렇게 거둔 곡식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예배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1904년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다.   어쨌든 추수의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지고 있다. 은혜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특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 뜻을 받들어 추수의 의미를 알고 주님께 감사하며 이를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한다. 특히 코로나 역병으로 추수감사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위기를 겪고 있지만,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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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1-12
  • 교회는 사회통합에 힘써야 한다
    이번 미국 대통령선거는 미국 사회의 국론분열이 어느 정도로 심한 상황인지를 전 세계에 여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라는 ‘극우주의자’, 아니 ‘극우주의자’라는 개념으로는 잡히지 않을 만큼 그 이색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미국의 국론은 양분됐고, 조 바이든이 당선 소감을 통해 외친 “분열된 국론을 통합”이라는 아젠다의 성취는 매우 요원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시민 중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트럼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많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국내적으로는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 건설을, 외교적으로는 오직 미국의 이익만을 중요시하는 트럼프의 노선에 찬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들의 다수를 기독교인들이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 사회의 기독교인들은 백인 중심, 미국 중심이라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이기적인 사고를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주장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여전히 흑인의 인권을 묵살했고, 동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을 차별했다. 미국의 주인은 자신들이라는 그 거만함은 그에 동조할 수 없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을 자극했고, 결국 미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이 되려 상대를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이 사태. 교회가 어려운 것을 교회 내부의 심각한 타락과 무능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건만, 정부가 탄압해서 교회가 어려워졌다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궤변을 반복하는 사태.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만큼 한국교회는 분열이 아닌 국민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돌아서야만 한다는 조언에 반드시 귀기울이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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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2
  • 건전한 시민의식에 합하는 교회되자
    한 한국사 전문가는 조선 중기부터 명나라에 사대하는 문화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조선은 항시 약소국으로서 주변의 큰 나라에 의존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싹텄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일종의 패배주의는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후 우리 민족은 우리 손으로 직접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결과 해방 이후 남쪽과 북쪽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친일을 하지 않으면 사상검증을 받았던 시절의 악습이 그대로 남아 친미를 하지 않으면 빨갱이라는 프레임으로 민중을 억압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기독교가 이러한 프레임 놀이에 앞장섰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흑역사다.    2,000년 전의 대한민국과 2,000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르며,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전혀 다르다. 과거에는 서양에서 왔다면 무엇이든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영화가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됐고, BTS로 대변되는 한류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K-방역은 전 세계의 칭찬을 듣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대한민국의 수준은 세계 어디에서도 뒤처지지 않게 됐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더이상 수동적으로 타인이 시키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타인에 의존하고, 타국에 의지해 살아가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제 스스로 진보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새겨 나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의 발꿈치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를 막아서고 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한국교회는 반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감히 그 누구도 주장하지 못하는 “나만 옳소”란 아집을 버리고 건전한 시민의식, 다중의식의 진보적 흐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희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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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성령운동 회복이 시급하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단절 상태가 되면서 비대면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웃의 왕래가 막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장차 다가올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시대적 환경이 기존 사회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앞으론 새로운 방식의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먼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해야 한다. 성령은 보혜사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보혜사라는 뜻은 다른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를 말한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실 뿐 아니라(요 10:30),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것을 증거한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을 얻는다(고전 12:3).    그러므로 이 시대의 ‘성령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내 삶의 실제로 살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 9가지의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는 생활이어야 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삶이 성령을 중심한 생활이요, 이를 실체적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참다운 성령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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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0-27
  • 한국교회가 사회를 선도하길 기대한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이념적이고 정쟁적인 문제들이 아닌 우리가 대면해 있는 실질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대면한 실질적 문제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후문제란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연합은 탄소배출량 저감의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우리는 유럽연합의 그린딜 정책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1990년부터 2018년까지 경제 규모가 61%나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 배출은 오히려 23% 줄었다.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노력의 결과였다. 이에 더해 유럽연합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2050년까지 유럽연합 내에서 탄소 배출 제로라는 더욱 강력한 목표를 담은 그린딜에 정책을 내놓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일찍부터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경제는 언젠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깨달았고,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구조에서 재생 에너지 환경으로 전환 작업을 착수했다. 유럽연합의 그린딜은 이러한 에너지전환의 일환으로 단순한 저탄소 정책만이 아니라, ‘화석연료 이후’ 시대의 새로운 경제정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정부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보수 개신교의 반-정부 성향으로 인해, 정부가 시행하는 모든 사안은 반대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억지를 부리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개신교의 문제는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반대 등 여전히 이념·사상적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후문제는 그 시급성에서 다른 문제들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기후문제를 인류가 되돌릴 수 있는 임계점이 7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인류가 기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찾아올 재능의 형태와 그 규모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교회가 기후문제와 관련한 사회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우리 시민의식을 선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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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10-22
  • 한국교회의 재탄생이 시급하다
    정부는 지난 12일부터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됐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도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교회의 생명은 교인 간의 사귐에 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일서 1장 3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됐다. 특히 거듭난 교인 간의 교제는 십자가 밑에서 맺어진 새로운 가족관계이자 사랑이다. 그러나 코로나 장기화로 교회가 곤고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교회가 사회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장 17절, 하박국 2장 4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5대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강조하면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은 먼저는 갈대아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다음으로 열국에 의해 갈대아인들에게 행하여 졌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먼저 그분의 선민의 집에서 심판하였으며(베드로전서 4장 17절).   오늘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코로나와 사람들의 교만으로 완악하게 된 것은 교인들이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심판의 모습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는 근원과 기초라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거듭남의 근원이요 동기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거듭남의 수단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견고하고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보좌의 기초(시편 89장 14절)이기 때문이다. 그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로마서 14장 17절). 더욱이 하나님의 복음 안에 계시 되는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종교개혁의 근본을 오늘에서 철저하게 살아내는 길이 한국교회의 재탄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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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2
  • 언택트 시대를 위한 신학연구가 시급하다
    신학(新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후반부에 의하면 모든 분과 학문을 거치고,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거친 후 그래도 남아 있는 추상적 대상, 즉 제일원인으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는 학과이다. 이렇게 그리스 철학사에서도 하나의 자리를 마련한 신학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의 등장으로 더욱 엄밀해지고, 로마시대의 기독교의 대두로 기독교 신학으로 변모된다. 주지하듯 기독교 시대의 신학은 주로 변증론으로서 당시 일반 사회에 기독교 복음을 변증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날로 변해가는 과학·유물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기독교 전통 사상과 성서를 우리 시대의 학문들과 대비시켜 연구해왔고, 우리사회가 자본·세속 일방으로 향하지 않고 그보다 상위의 가치를 잊지 않도록 나름의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전환에는 신학이 대처하기 어려운 근본적 문제가 깔려 있다. 바로 언택트 시대의 도래가 그것인데, 신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피조물로서의 이웃과의 관계를 그 핵심적 대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문경지교(刎頸之交), 즉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그 숭고한 정신을 몸소 보이셨는데, 우리는 나의 목숨까지도 이웃에게 내어주기 전 반드시 깊은 사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이념적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자면 먼저 이웃과 교제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언택트 시대에도 이웃과의 깊은 교재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사회에 제공해야만 한다.   교회와 신학이 이미 변해버린 사회 환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기성의 질서에서 사유하고 신앙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신학의 미래는 없다.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기독교는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 200년 전 예측했지만 기독교는 변해가는 상황에 적응하며 여전히 건재하다. 근대 계몽주의 강력한 도전에도 살아남은 우리 기독교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기를 잘 이겨내길 기대한다. 그리고 신학이 그 위대한 도전에 앞장서주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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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거룩한 교회 회복하자
    오늘의 한국교회는 위기 가운데 있다. 외부로부터는 세기의 역병인 코로나로 인하여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교회의 본질이 위협받고 있다. 외부적으론 이단의 발흥과 도전에 무방비한 상태에 있고 내부적으로는 기독교가 세속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교회 속에 만연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인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잘못된 가르침은 물론 순수한 복음이 사라지고 거짓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기에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라오디게야 교회의 상태를 보자. ‘라오디게아’라는 뜻은 ‘백성을 기쁘게 하다’는 뜻인데,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현대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육신적으로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그야말로 곤고하고 가난한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교만하여 자기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데 있어서 빈궁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풍요함에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빈궁하며, 눈 멀어 참된 영적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타락한 교회 밖에 서서 그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는 세속화된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충고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내가 너를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여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장 18절).   그리스도를 위해 나의 가정과 내 장래와 내 운명과 내 온 인생을 대가로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교회의 길이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세속화된 교회의 미지근함과 교만을 이기는 것이요, 필요한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는 것이며,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연다는 것이 모범된 공동체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사설
    20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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