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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정론-1
    소기천(장신대 신약학교수/한국교회정론대표)   오바마가 미국에 남긴 공헌은 오바마 캐어인 전국민 의료보험체계와 동성애 인권 논리이다. 트럼프가 기적적으로 클린턴을 꺾고 45대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이 두 가지를 폐기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 가지고 갔지만, 판결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과연 더는 논란이 없는 문제일까?   오바마 8년 동안 미국이 정책적으로 동성애, 젠더 정체성, 사회적 성평등, 낙태 조장, 이슬람 난민 허용,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등을 실시하여 진보적인 소수 종교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침묵하는 다수인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많은 기독교인이 민주당의 기세에 눌려서 살던 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독교가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론 지난 트럼프 재임 4년 동안 온두라스에서 시작된 이민자들이 무작정으로 걸어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열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음으로써 꽉 막힌 상황에서 미국의 반이민 정서에 인권 문제까지 불을 붙임으로써 논쟁이 가중되었지만,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함으로써 어느 샌가 매스컴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국경을 봉쇄하여 미국인의 일자리를 사수해야 한다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어느 사이에 쿠바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대거 몰려가서 터전을 마련한 이후의 상황에서 같은 히스패닉계이지만 쿠바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옹호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반이민 장벽을 쌓은 것을 지지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4년 전의 대선처럼 플로리다를 민주당에게 내주지 않은 보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7천만표를 얻은 트럼프는 재임으로까지 이어지기 어렵게 되었고, 바이든이 미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7천5백만표 이상의 득표를 하고 대의원의 과반수를 얻은 상황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승복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법적으로 반발하기 때문에 바이든은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얻지 못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의 와중에 미국에서 국론 분열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기에, 누군가는 나서서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시급하다. 그동안 미국 대선은 정책 대결보다는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대방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일에 급급한 것이 선거가 끝난 상황에서도 트럼프가 좀처럼 백악관을 내줄 것 같지 않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일단 대선이 끝났고 개표가 말해주듯이 바이든이 대의원의 매직 넘버인 270표를 훌쩍 넘긴 상황이다.   바이든은 3수라는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었지만, 과거에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은 것처럼 앞으로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일이 전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바이든은 트럼프가 어려운 여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이전에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린 정책에 대해 인정하고, 미국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는 트럼프에 대해서 전염병을 핑계로 사사건건 마스크만을 물고 늘어지고 여론몰이를 통해서 트럼프를 조롱하고 깎아 내린 가벼움을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중시하여 주례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이든이 어떤 경우에서도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대선 유세를 마무리한 행보를 비난한 것이나 자신의 선거에 유리하게 거액의 광고를 통하여 계속해서 조롱한 것은 결코 세월이 지나간다고 쉽게 잊힐 일이 아니다. 그만큼 바이든은 절대다수의 언론 매체가 지지하는 기반을 바탕으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그를 지지하면서도 침묵하는 샤이 트럼프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바이든이 대선에 이기고서도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쉽게 얻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8년의 재임 기간에 교회는 양분되었다.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회가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하고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락하게 되자, 2천여 개의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여 1/3로 교세가 줄어들었다. 프린스톤 출신이 한국 신학교에 대거 몰려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몇몇 교단은 동성애 인권 논리의 싸움터로 변질되었다. 이것을 거울로 삼은 미국감리교회는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용한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동성애 지지파와 동성애 반대파가 교단을 분립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국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말한다. 그런데 신학교가 동성애를 성경대로 죄악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인권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인권 선언문과 권리장전에 동성애가 인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가? 동성애를 인권으로 옹호하는 것은 상황 윤리를 근거로 하는 논리이며, 사회적 성과 젠더 정체성을 옹호하려는 반성경적인 주장이다. 트럼프가 승복하지 않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발생한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기독교가 동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바이든은 깊이 생각하고, 오바마의 8년 재임 기간과는 다른 인권 정책으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여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죄악이다. 인권으로 옹호를 하므로 동성애자가 파국으로 치닫다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야 뒤늦게 뉘우치고 동성애로부터 돌이켜서 탈동성애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이후이다.   바이든은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인권 논리에 빠져서 동성애자 결혼식 주례를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대로 굳게 믿고 나가는 샤이 트럼프, 곧 다수의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든은 4년 내내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이든은 성경의 진리를 존중하여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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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23
  • 코로나 이전부터 문제였다
        코로나19와 연관된 논의가 사회는 물론이고 교계에서도 한창이다.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올해 2월에 설문조사를 시작한 이래 내년 전반기까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되는 ‘코로나19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교회의 사역은 거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대략 내년 말쯤이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방식으로 끝나든 독감 바이러스처럼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든,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한 예측과 대책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받는 타격을 추스르면서 내부적으로는 목회의 동력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걸려 있다. 향후 5년에서 8년 어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골든타임,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매몰된 사람이 생존한 채로 구조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말한다.   1885년을 한국 선교의 기점으로 본다면 선교 역사 110년만인 1995년부터 한국 교회의 교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벌써 25년 그러니까 사반세기가 지났다. 양적으로 성장을 구가해온 시간의 거의 사분의 일 동안 이미 쇠락해온 것이다. 1999년에 저 유명한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한국 교회의 하락과 연관해서 상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2020년의 코로나 상황에서 불거진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올해의 문제가 아니다. 사반세기 전부터 현상이 시작된 것인데 코로나 상황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표출됐을 뿐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볼썽사납게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들의 신학적이며 인격적인 소양 저하, 지도자들의 윤리적 해이, 신학교육 기관의 동력 상실, 연합기관의 분열과 대표성 약화, 교단 및 교계 정치의 비윤리성, 기복주의에 토대를 둔 번영신학과 물량주의적 성장 신학, 교회 직분 제도의 경직성, 그리스도인 개인의 자기정체성 약화와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 …….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영역이 어디인가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교육, 의료, 한글 교육, 생활 개선, 민족의 정체성, 국제적 연결 등 사회 전반에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였다. 우리 사회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지나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걸어오는 동안 교회의 부침이 많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회는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사회 상황과 연관해서도 동력이 충만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과 신사참배를 놓고 교회의 분열과 부끄러운 자기정당화가 있었고 한국전쟁과 이후의 상황에서 좌우 대립의 극심한 반목이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굴곡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열정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구제가 한국 교회에 넉넉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교회가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시절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쇠락의 변곡점이 어디였나. 한국 교회가 신앙의 동력을 잃어온 시간이 이제는 꽤나 길어서 한두 가지 처방으로는 회복되기 힘들다. 기초 체력이 워낙 허약해져 있어서 근본적인 원인 진단과 중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진부할지 모르지만 오래된 가르침을 듣는 것이 확실하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명제 말이다. 교회는 자신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순례하는 나그네 공동체다. 자신의 제도와 구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교회는 병들고 허약해진다. 자신 스스로가 목적이 되면서 교회는 끝내 타락하고 복음에 대적하는 세속 집단이 된다.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힘차게 작동하는지 보면 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을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일성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거룩한 이중 국적자다.   그러면 묻자.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릇 ‘나라’라고 할 때는 어떤 법이 구속력을 갖고 작동하는 일정한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 곧 성경 말씀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교회 역사에서 신앙이 병들고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쳤던 소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자’였다. 기독교 신앙의 시원(始原)이 성경이니까 이 외침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처음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는 주님 바라보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온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고 우러르는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 몸부림해야 한다. 성경을 끌어안고 십 년 정도는 외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 회복은 묻지 않아도 좋다. 성서의 말씀대로 살면 사회적 신뢰는 문제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 운운할 필요도 없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강력해진다. 코로나 한참 이전부터 문제였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풀려면 코로나 한참 이후까지 바라보는 긴 호흡을 갖고 다시금 온몸을 던져야 한다. 말씀 속으로.    /지형은목사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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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8
  • ‘있음’의 감사 ‘없음’의 감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끼는 재산이든 내 옆에 항상 있을 수는 없다. 내 존재도 그렇다. 있다가도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진다. 그래서 삶이란 “있음”과 “없음” 사이에 놓여 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존재’, 곧 ‘있음’에 집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재산이 “있고”, 명예와 권력이 자기에게 “있게” 하기 위해 골몰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게 되면 만족스러워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있음”에 방점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재산이 불어나고, 사업이 성공하며,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질 때 자연스레 감사하게 된다.   추수감사절도 그 시작은 곡식의 풍성한 결실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신 것’ 곧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세어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만약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될까? ‘욥’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한국 기독교는 최근 들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 사회에서 쌓아온 사회적 존중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낮아졌다. 실제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싸늘한 눈초리를 자주 느끼게 되었다.   일반시민들은 기독교가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며, 타협과 관용이 없는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는, 길거리에 나와 좌파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강경 우파의 중추세력, 코로나19 방역 상황에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감염은 아랑곳하지 않는 집단, 감염된 뒤에는 자신의 행동을 숨기고 거짓말까지 하여 방역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다. 교회는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억울한 부분도 적지 않다. 때로는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영향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간에 이미 교회는 어린이와 젊은이의 숫자가 급감하고, 새신자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교회는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점차 노령화되고 있다. 설상가상,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가 늘어나면서 교회의 결속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다시 대면예배를 시작했지만, 출석 교인 수와 헌금이 크게 감소했다는 걱정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년에는 교역자들을 줄이고 인건비를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듣는다. 개척은 꿈도 꾸기 어렵고, 작은 교회들은 존립이 위태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앞으로 이어질 거라는 데 있다. 그야말로 위기다.   교회는 지난 20~30년간 한국 사회의 발전과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부흥했다. 사람도 돈도 넘쳐났고, 영향력도 권력도 커졌다. 그야말로 “있는” 시대였다. 이제 교회는 “있는” 시대에서 “없는” 시대로 넘어간다.   다시금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참 신앙인은 “있어서만” 감사하지 않는다. “없어져도” 감사한다. 아니 “없음” 때문에 더욱 감사한다. 신앙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우리는 명예나 부, 권력의 포장이 벗겨질 때 참 자기를 보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저, 위기는 본질을 깨닫게 한다. “없음”의 시대에 신앙을 굳게 하고 더욱 감사할 준비를 해야겠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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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12
  •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자
      올해는 종교개혁 기념 503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종교개혁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루터는 처음부터 교회의 제도를 개혁하고 교리를 개혁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신앙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선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시대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새로운 기준이나 표준이 생겼다는 뜻이다. 인류는 이 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겪고 있다. 오랫동안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비대면 예배를 드렸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배가 무엇인가? 신앙이 무엇인가?”   루터교에서는 교회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찬이 바르게 집행되는 교인들의 회중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루터교 예배는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루어진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고 성례전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배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근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하고 공동예배를 드리며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것이 예배의 전부이고,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주일성수하지 못하고 공동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면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예배의 근본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1~2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종교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신앙의 근본을 생각하고 예배의 근본을 생각하며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예배로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누가복음 11장 42절).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고 십일조만 드리면 신앙인의 책임을 다했다고 만족할 수 있는가? 루터는 당시에 교회에 나타난 도덕적인 타락 현상만을 보고 교회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근본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교회를 보고 공격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태는 백신을 개발한다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개혁이기도 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학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을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사랑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으로 파송 받은 자로서 세상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세상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 역사에서 보면 사회에 전염병이 돌 때 교회는 전염병자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돌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공동체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을 때 탐욕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아닐까? /루터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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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3
  • 태어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2020년 10월 7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낙태죄 개정안은 여론이 자연법칙을 이기고 정치가 생명과학을 이긴, 후대에 수치스러운 시도가 될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였다.   헌법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이며, 민법에서도 생명의 시기는 수태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법 정신이나 실정법이 태아가 생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태어날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국가가 법으로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한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의 목소리는 낙태에 대한 책임이 남성과 사회는 빠진 채, 여성에게만 부과되어 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오늘 입법 예고된 법무부 낙태죄 개정안은 임신의 공동 주체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하고, 수많은 여성은 피임의 수단으로 낙태를 강요당하게 만들며,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동안 지속해서 제기되었던 임신의 책임이 있는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법안 마련 등의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임신 14주까지 사유를 불문한 낙태 허용 입법 예고는 태아의 생명 보호의 최소한 장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엄연한 차별이며, 생명침해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생명과학 전문가 그룹인 의학계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했는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는 남성의 양육책임법을 제정했는가? 여성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낙태가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를 입히는지에 관해 충분한 연구와 의견수렴을 했는가? 여성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법무부의 낙태죄 개정안 입법 예고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태어난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악법을 예고하였다. 과학과 의학은 생명의 시작에 대한 진실을 계속 증명해내고 있고, 사회는 모든 생명이 조건과 상관없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중대한 차별을 입법 예고하였다. 우리는 어느 순간까지는 생명이 아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생명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주까지의 태아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한민국 정부에게 묻는다. 97%의 낙태 시술이 임신 14주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법조문의 실제 내용은, 앞으로는 모든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이 아닌가! 의학계와 생명과학계, 그리고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의 의견만을 편들어 14주라는 생사의 구분선을 마련한 정부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실제적 조화를 이뤄 개정안을 발표하였다고 하였으나,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을 보호하는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타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인권적 시도를 정부는 당장 철회하기를 요구한다. 태아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우리 모두 경험한 과거이다. /사단법인 프로라이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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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정도를 걷는 개혁의 정신 회복하자
      두 번째 밀레니엄을 앞두고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100가지와 인물 100인을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쿠텐베르크의 성경인쇄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에 이어 세 번째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순위에 들어있다. 미국 문화권에서 선정한 것이기에 다른 문화권의 시각에서 보면 선정과 순위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조사하던지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이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어느새 우리의 삶에 자리잡고 있는 천 년의 사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종교개혁은 과거에 지나간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어야 한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의 본질과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 오늘의 개혁을 이어갈 우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자.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본질에로의 회복이다. 개혁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원래로의 회복, 원래적 진리에로의 회귀가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15세기 가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무수히 왜곡시켜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이 왜곡으로부터 개혁하여 원래의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5세기 로마 교황권은 어떻게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유명한 것이 면죄부이다. 루터의 95개 논제 중 27조는 이렇게 말한다. ‘헌금함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면죄부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돈으로 신앙적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구속의 사건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95개 논제의 79조는 말한다.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교황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모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참이나 왜곡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95개 논제 10조에는 이런 언급까지 있다. ‘임종을 맞은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교황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대리했다. 이런 왜곡으로부터 본질을 회복하고 참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바른 정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세계는 어떠한가? 인간적인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교리, 신학, 목사, 사람, 돈, 권세, 교권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상위 개념에 둔다면 그곳이 개혁의 자리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회를 개혁하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비난받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개혁의 정신을 망각하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자기의 이익추구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이제는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부단스런 짐이 되고있지는 않는지 우리 교계가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무장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한국교회가 상실했던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현실은 어떤가? 참 진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정도가 아닌 꼼수와 술수가 지혜로운 처세술로 용납되고 있지는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참 진리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많은 이익이 있더라도 사도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참 진리가 있는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제의 종교개혁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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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2
  • 추석을 맞는 기독교의 효정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다. 우리는 죄와 문제와 우리 육체를 이기기 위해서 자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유자가 되었다. 그래서 자유자는 예배자이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고린도전서10:20)라고 했을 때의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 고사이다. 제사와 고사는 다르다. “이방인의 고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라고 성경에 번역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한다. 부모님과 조상에게 하는 것은 고사가 아니라 제사라고 구분이 되어 있다.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한국에는 무당집에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그 중에는 교회의 제직자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구원 받기 위해서이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잘하면 그 다음에 복이 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면,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나라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살면 주인이 책임져줘서 영양 있는 것 맛있는 것을 다 먹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체이시고 완전한 분이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심판주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온전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적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성경적 효는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어른을 공경하며,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성실과 열심으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부모님과 상의하고 결정하자고 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어른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존중하고, 스승은 제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청소년·제자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겸손과 온유로 인내하며 가르쳐서, 신앙과 삶을 바르게 전수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나라, 가족, 교회는 밝은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천국은 가족이고 가족은 작은 천국이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신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초로 만들어 주신 공동체다.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우리의 가족이 바로 설 때 신앙천대, 축복천대, 자손천대가 이루어진다.   나라 사랑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더불어 대한민국에 속한 백성이다. 최고의 나라 사랑은 대한민국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가 제물이었다면 신약의 예배는 감사를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물질을 드릴지라도 감사하며 드려야 한다. 물질을 아무리 드려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직접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은 부모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버금가는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인 것이다. 올 추석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심을 담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 참다운 기독교의 효 정신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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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5
  • 생산적인 장로교 총회를 기대한다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회는 총회를 맞이한다. 총회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고 거창하게 취임식을 하지만, 그것을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매년 한국교회가 새로워졌다는 말을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다시 한번 장로교 총회에 관해 기대해본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절망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위험하는 뜻도 있지만,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로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의 공통된 의식은 한국교회가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번 장로교 총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산적인 총회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세계적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확직자들이 생기고 수많은 귀한 생명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몇 개월씩 교회 문을 닫아야 되고 온라인 예배가 일상적인 예배가 되고 있다. 얼마 전 CTS에서 어느 대형교회에서 텅 빈 예배당 앞에 온라인 설교를 시작하는데 설교자가 기도하면서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함께 울었던 일이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이 설교자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목회자의 모습이 아닐까! 필자가 생산적인 총회를 기대하는 것은 지난날에 수없이 치러진 총회의 모습을 탈피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좀 더 생산적이고 실제적인 변화와 개혁의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첫 번째로 이번 장로교 총회는 개혁적인 인물을 찾아서 지도자를 세우는 총회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천사를 통해 일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기에 개혁적인 지도자가 세워져야 한국교회는 개혁되고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깊고 대형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보다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개혁적인 목회철학으로 목회하는 지도자를 세워야 교단도 교회도 개혁될 것이다. 40대나 50대의 지도자를 한국교회 총회장으로 세우는 일은 무리한 기대일까? 한번 다시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두 번째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모이는 교회 위주의 목회였다면 코로나 재난 이후에는 흩어지는 교회의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온라인 예배와 함께 온라인 교인이 더욱 많아질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앞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위한 교단적인 정책과 신학이 바로 서도록 총회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지도자도 훈련해야 하며 교육 받은 지도자가 전력으로 사역에 매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한 정책도 세워가도록 총회 차원에서 연구하고 토의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오늘의 교회가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문제들이 자살예방 문제요 저출산 문제요 빠르게 가고 있는 고령화 문제이며 최근에 중요한 이슈가 되는 동성애 문제나 차별금지법 문제도 총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도 하고 반대도 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을 개교회 문제로만 돌리지 말고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고 총회 차원에서 필요한 정책이나 입법화를 위해 생산적으로 숙의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이번 장로교 총회야말로 오늘날 위기의 시대에서 한국교회가 기대하는 비전과 메시지를 줄 수 있는 희망찬 성총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기감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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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사랑제일교회사태’와 한국교회의 대응
      사랑제일교회 사태는 극우적 정치이념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결합해서 일으킨 국가적 재앙이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안전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몰상식의 끝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막말과 폭언이 횡횡하고, 그 어디에도 이성과 합리적 판단이 들어설 곳은 없다. 이론 인해 한국교회는 코로나 재유행의 진원지가 되었고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사랑제일교회 이외에도 교회감염이 지속되고 있지만, 사랑제일교회 발 감염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어서 우리 사회의 일상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고 한국교회에도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좋지 않았는데, 그 추락의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신천지보다 더 하다’는 표현은 의료진들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신천지 교인들은 그래도 치료에는 순종적이었는데, 이번 교회발 감염자들은 병상에서 의료진들에게 폭언을 하고 생떼를 쓰는 등 그 태도가 불량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결국 식당이나 마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받지 않는다.’는 공고가 붙을 정도가 되었다.    필자의 교회도 버스정류장에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포스터를 붙여놓았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계속 찢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심각하고 비상한 상황이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전광훈 현상’의 구조는 간단치 않다. 교계의 문제를 넘어 여러 사회·정치적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전광훈목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광범위한 관계를 맺었고, 보수 정치인들과의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보수기독교의 아이콘’으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막무가내다. 국가적 재앙을 일으키고도 ‘바이러스 테러다’, ‘확진자 조작이다’는 가짜뉴스를 유포했다. 여기에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은 검사를 거부하고, 병원을 탈출하는 등 반사회적 일탈행위를 일삼고 있다. 심지어 국민생명안전을 위한 국가의 방역활동을 정치방역으로 몰고 가며 방역당국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교계원로 몇 분이 비판하는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의외로 한국교회의 각 교단은 침묵하고 있다. 사회적 이슈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의 침묵도 계속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전목사와 함께 한 사안들이 있고, 무엇보다 교인들 중에서 그의 입장을 지지하고 따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상황일수록 교회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예’할 것을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랑제일교회 사태’에 대해서 용기 있게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랑제일교회 사태’가 우리사회에 끼친 해악과 그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세상의 등불인 교회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여러 교단들에서 이번 가을총회에서 전목사를 이단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공교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가 될 것이다.    ‘전광훈 사태’는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분단된 나라에 살아가는 아픔으로 인해, 사랑과 용서라는 복음의 가치와 정반대되는 증오와 대결을 키워 온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상식과 합리에 기초하여 시민사회에 소통하지 못한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에게 이 일은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뼈를 깎는 아픔의 시간이 왔다는 말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실로 그렇다. /기장 총회장·성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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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1
  •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미래위한 제언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마이너스 성장과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요소들이 복음전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 즉 목회자 양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대처해야 한다는 긴박한 요청은 당면한 과제이다. 해방이후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한국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하면서 지도자 수급을 위한 대처를 해야 했을 때 미래를 위한 교육이 아닌 당장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에 급급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부작용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발전함께 그 이면에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신학교 지망생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신학교가 돈벌이 수단이나 교단과 학교의 외양을 키우는 도구가 됨으로써 신학대학들의 양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보니, 신학교육의 내실과 목적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바르게 준비된 일꾼을 양성하지 못한 책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루에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하루라도 빨리 대처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족지만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첫째 진정한 소명자를 발굴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직업인으로서, 내지는 은퇴 이후의 제2의 의미 있는 직업정도로 생각하는 신학교 지망생들이 많다는 사실에 걱정이 많다. 그럼에도 신학교들은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인지라 이들을 후보생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이다. 진정한 소명자, 목회자로서 소양이 갖춰진 자는 지교회 담임목사와 당회가 가장 일선에서 발굴해야 한다. 둘째 종교적 기능인이 아닌 복음의 전문가를 만들어야 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신학교육은 단순한 종교적인 기능인을 양성해서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급급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목회는 단순히 설정한 목표를 향한 성과를 위해서 기능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는 전인적 차원의 인간관계와 삶의 나눔과 섬김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목회자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지도자이다. 따라서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지체들과 동행하는 삶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는 결코 기업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셋째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헌신자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한참 성장할 때 신학교에 추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신학교에 가도록 했다. 어쩌면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의 모습이 있게 된 원인들 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한국교회가 우민화되어서는 안 된다.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소양과 충분한 신학적 의식이 준비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경건한 신앙인격자로 양성해야 한다.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신학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신자들과의 관계에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경성하는 자의 모습으로 깨어있어,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인격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철저하게 신앙과 인격을 하나로 드러낼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교육을 해오는 필자로서 한국교회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어진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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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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