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실시간뉴스
  •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지만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론자로 살 것이냐 아니면 무신론자로 살 것이냐 일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의 질과 영혼의 구원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과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과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과의 차이점은 삶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접할 때마다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지난 냉전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간에는 우주 항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우주선에 탑승했던 미⋅소 양국의 우주인에게 당국에서 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귀환한 후에 자진하여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상반된 진술을 하였다. 즉 인류역사상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대기권 밖에 진입해서 우주여행을 하였던 소련의 가가린은 “여기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어디를 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후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였던 미국의 우주 비행사 암스트롱은 여행 중에도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했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진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사상을 평소에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무수하지만 그 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서 주님이 수난당하시기 직전까지 책망을 받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과 성령체험을 하면서 불과 40여일 만에 성숙한 영성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하여 선교의 지평을 열어가는 인물로 쓰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존 뉴톤 같은 수많은 탕자를 만인의 숭앙을 받는 성자로 만들어 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살면서 예배생활과 성경적인 삶과 기도 생활을 중히 여기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천국에서 누릴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과 성령체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기를 바란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4-08
  • [사랑의 실천] 후안무치의 세대
         우리는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허탈함을 넘어 절망에 이르는 수준이다. 국민소득 삼만불·경제대국·일류아이티산업·조선산업·K문화 등 정량적 면에서 선진국에 가까워졌으나, 정상적 면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러한 괴리가 오늘 진통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취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정치꾼들·법률보다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판관들·저울을 속이는 장사꾼들·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들을 나 몰라라하는 의사들·사람을 쉽게 죽이고도 자책이 없는 살인자들 그리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큰소리 쳐대도 아무렇지 않는 세대에 우리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정말 인간다움을 포기한 듯한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생명경시·물질만능·이기주의·도덕불감증·가치관상실 등 이런 것들의 극복없이는 사회의 병폐는 치유될 수 없으며 국가의 밝은 미래는 담보되지 못한다.    이제 교회가 하여야할 일은 뚜렷해졌다.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성경적 가치관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이 붕괴되고 가정교육마저 상실된 현시점에서는 교회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공공의 선이 우선되는 가치관·너와 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통합·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건설·각자의 깨끗한 삶과 정직한 삶 그리고 나라사랑함,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고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국교회가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 절대적 명제는 하나님께 의뢰함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이 나라를 보우하사 아름답고 튼튼하고 정의로운 나라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실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하며 그 안에서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나라되게 하소서 아멘” /서울신대 전 총장·한기총 전 총무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3-05
  • [사랑의 실천]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자들이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 체득된 신앙의 노하우, 생명을 내건 투쟁의 목표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사도들의 전승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까지 이렇게 항거(Protest)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반추해 볼 때 교회가 부흥하던 다섯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 시기는 A.D 100년을 전후해 사도들이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던 시기요, 두 번째는 A.D 300년에서 430년 사이 황금의 입으로 불리며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전했던 크리소스톰과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한 어거스틴이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수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2세기에서 13세기로 이때는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말씀으로 밝히던 시기입니다. 다음은 16세기인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졌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스펄전 등이 주도하던 각성 운동의 시기입니다.    지난 2천 년 역사 가운데 다양한 교회들과 메신저들이 존재 하였지만 이 다섯 시기에 가장 안정되고 성경적인 건강한 부흥을 이룩하였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로고스로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올곧게 전하던 말씀의 사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두말없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회복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회복이며, 이렇게 될 때 실추된 교회의 권위 역시 회복될 것이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신인(神人)관계가 뒤틀린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시 147:18) 그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살리는 일(시 119:50)을 하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하셨기에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예수님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길 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평안해지듯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신측 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20
  • [사랑의 실천] 선한 목자 리더십
        성서에 나오는 여러 비유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슴뭉클한 비유가 있다. 바로 목자와 양떼의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속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더 깊은 내용이 있다. 바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가면 따라간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양떼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꼴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 목자에게 맡길만큼 절대적으로 목자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 목자에 대한 백퍼센트의 신뢰가 없다면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무시할 것이다. 그때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전적인 신뢰로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이름 몇 번 불러주고 엉덩이 서너번 두드려 주었다고 양떼들에게 그 목자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기 까지는 생명을 나누는 전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목자는 아침마다 우리에 들어가 양들을 쓰다듬으며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더러운 양들은 목욕을 시켜 주었을 것이고 상처난 양은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눈꼽 낀 양은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을 것이다. 더러는 약한 양이나 병든 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는 밤새도록 그 양을 가슴에 안고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양들이 위급에 처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서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 목자는 양들이 잠들기 전에는 먼저 잘 수 없었고 양들이 먹기 전에는 먼저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양들은 목자를 믿게 되고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속에서 작은 목자이다.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 목자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이 목자이다. 직원들에게는 사장님이 목자이다. 백성들에게는 대통령을 포함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목자이다. 조만간 나라의 일군을 뽑는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지도자, 백성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려주는 지도자,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그 음성을 듣고 의심없이 따라가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그런 참으로 선한 목자같은 나라의 일군들을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한 마리 양떼의 과욕일까?/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2-05
  • [사랑의실천] 야곱의 씨름
       주님을 쫓아 사는 것은 종종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경우는 한시적이나마 나를 낳아준 부모를 버려야 할만큼 뼈아픈 일도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들을 버려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이런 것들에 얽매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생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뿐 결국 손에 쥐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는 회한이 그를 잠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참 용기를 아는 사람들은 한시적인 이런 고통들을 참아낸다.야곱이 그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멀쩡하던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을 잘 모를 만큼 극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가진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결심으로 그 샅바를 놓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간혹 이런 고통 속에 처해진다. 일주일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세상 일에 또는 사람들과 소홀해지기 쉽다. 이런 것은 그래도 감수하기가 쉬울 수 있으나, 내가 세상에서 취득한 모든 경험과 재산, 가치관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치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부인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자기가 극심하게 반발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세상의 것은 일단 버리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작업이며, 영원히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의 편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인생의 짧은 경험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역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헌 부대를 버려야 한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독을 내미는 부모는 없다. 이것이 독인지 떡인지 미리 먹어보는 위험을 감수할망정 자식을 사망의 길로 이끄는 부모는 없다. 하물며 태초부터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신 분이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겠는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높고 깊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을 받기까지 그 또한 연약한 인간이었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을 잣대 삼아 세상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손에 무언가 쥐고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굳게 믿고 실천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23
  • [사랑의 실천] 인생의 커다란 밑거름
         1977년 3월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여 입학식을 한지 벌써 46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고 김연준 총장님의 훈화의 말씀과 교훈(校訓)인 ‘사랑의 실천’이 가슴에 뜨겁게 와닿았습니다. 그해 1학년 1학기말 종강파티를 마치고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한 달 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병석에서 신음했습니다. 그러다 아픔 속에 있던 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을 읽고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던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기적적인 치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행당동산을 떠난지 46년이 흘렀지만 그 때의 ‘사랑의 실천’은 그 후로도 저의 일생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야간신학교(성서침례신학교)와 함께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수도경비사령부 군종사병)에 다녀와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과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에 가서 공부할 때도 ‘사랑의 실천’은 저의 학업의 기초가 되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따라 치유상담을 연구하고 치유목회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전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26년 째 가르치다가 정태기총장님의 뒤를 이어 총장이 되고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되어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저의 신앙과 삶의 기초가 된 행당동산에서의 ‘사랑의 실천’ 덕분이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다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9~17)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1-09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사랑의 실천’의 전파자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양대학교의 교훈은 ‘사랑의 실천’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독교 신자이니까 기독교의 사랑과 연결지어 성경(聖經)에서 그 말을 가져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종교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성장기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가 있는데, 굳이 근원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資産)에 나의 인생 철학을 보태서 만든 것이다.  내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배당에 나간다는 것과 나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똑같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입으로만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뿐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의 실천’을 만들게 된 발상(發想)의 근원에는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의 교훈으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성경에서 얻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더러 이와 유사한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랑으로 사는 운동’이라거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등에서 그 유사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요즘엔 ‘사랑의 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랑의 실천’에 대해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몇 해 전에 ‘사랑으로 사는 운동’ 본부에서 나를 찾아와서 주제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노래를 작곡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면 나를 떠올릴 정도로 나는 일생 동안 그것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9-05
  • 한국교회의 영성회복
      한국 교회는 위대한 영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이 황폐했던 강토에 찾아왔다. 희망도 없고 깊은 좌절과 혼돈 속에서 한민족의 운명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 속에서 그 거룩한 뜻이 임하신 것이다. 그의 나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비참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들려왔다.   특히 20세기 초 대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복음적 캐릭터를 결정한 놀라운 민족적 경험이었다. 거기에서 핵심을 이룬 영성은 회개였다. 망국의 비애와 함께 개인적인 깊은 죄의 깨달음이 있었다. 그 이후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바로 이 회개와 십자가의 복음이 근본이요 본질임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고난과 순교의 역사를 통해 지켜온 이 십자가의 복음의 영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이제 경제 강국이 되었고 교회도 크나큰 성장과 외적, 물질적 부흥을 이뤘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속에 깊이 새겨진 십자가의 영성과 복음의 핵심은 다른 많은 것들에 의해 휩싸이게 된 것 같다. 이 때문에 십자가는 신앙, 영성의 중심성을 잃게 된 것이 아닐까?   한국교회 영성의 회복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타적인 사랑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성령의 은혜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내어드리고 성령의 인도 속에서 완전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인과 주님을 따르는 데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영성의 회복은 바로 십자가를 다시 찾는데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원리, 가치를 따라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한국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하려면, 십자가의 길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되어 세상에 빛과 향기를 다시 발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이제 이 환난의 시기를 통해 한국교회의 영성이 본래적인 형태를 회복하고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감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8-26
  • 진정한 사랑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랑으로써만 보호될 수 있고 정의는 사랑이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사랑은 정의를 추구함으로써만 실천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할 때, 각자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행사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공정한 사랑의 바탕에서 남을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 때만이 비로써 공의의 법과 정의에 대해서 말을 한다. 법은 옳은 지성이 합치될 때 의를 나타내고 공정하게, 모두에게 적용된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매우 흔하게 공정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한다. 언론 보도에도 공정한 사회 기강을 말하고는 있으나, 실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편파적인 일들이 너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어느 종교단체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변화가 많은 이 사회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조차도 없다. “왜 그럴까?” 정의가 상실된 사회에서 공정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회 속에 하나의 일원으로 살면서 엄청난 불의와 부정이 자행되고 편파적인 일들을 수 없이 당하고 격어 왔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속았고 또 배반을 당한 것이다.    공정은 먼저 자신을 향한 진정한 호소여야하고 자신이 먼저 공정하게 할 때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정을 말하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의 눈에 정의롭게 비쳐져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공정의 외침은 오직 독선이요 허구일 뿐이다. 그리고 공정이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인간의 위대한 인격적 품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로써 창조주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그럴 때만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마음속에 사랑을 품을 수 있다. 진정한 사랑만이 공정한 사회, 정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    이웃을 해하여야 자신이 잘되는 줄 아는 잘못된 이기적 양심을 가지고 어떻게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수없이 들었던 정의사회, 부정부패, 부조리가 없는 공정한 사회실현은 마땅히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엘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8-08
  • 병원, 가장 좋은 사랑의 실천도장
      ‘사랑의 실천’은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몸소 사회에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그것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어두운 곳이 너무나 많다. 그 어두운 곳이 우리 주변에서 말끔히 사라질 때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실천’은 비로소 사회에 실현되는 날이 된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나는 많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을 설득하여 한양대학에 의과 대학을 신설하고 부속 병원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지만 그 중에도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 당시 내가 반드시 병원을 설립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를 꼽는다면 두 가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이 가난한 나라로서 병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실 의료의 빈곤으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돈 없어도 치료를 받아서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혜택을 베풀자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공개하면 병원이 며칠 못 견디므로 간부들끼리 약속을 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이고 교양인들이고 기독교신자이고 또 교육자이고 하니까 우선 그런 사람 중에 중병에 걸렸어도 돈이 없어 어려워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 무료로 치료해주자’고 비밀 약속을 해서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다.   둘째는 일반인들로서 아주 가난한 층의 사람들에 대하여 무료치료를 해 주자는 것이엇다. 우리의 불우한 이웃들이 약 한 번 제대로 사먹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고 할 때 그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말자고 했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귀한 존재인데 그런 귀한 존재에게 고난은 수시로 닥쳐온다. 심지어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병에 걸려서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여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8-06
  • 교회를 향한 바람에 지혜롭게 맞섭시다
    우리나라는 전국 방방곡곡이 십자가로 뒤덮힐 정도로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기독교는 큰 성장을 하여 130여년의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대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킨 선조들이 흘린 눈물과 기도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와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봉사와 구제를 통해 국민의 마음에 기독교를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초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역대 정권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서 교회는 국가 권력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50여년간 지켜져 왔던 정교분리라는 안전판이 종교인과세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향한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 선봉에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언론들이 국민 여론이라는 이름의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12사도를 파송하시면서 이 세상은 양떼를 삼키려는 이리이고 양이 이리를 이기려면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를 삼키려는 이리의 이빨이 바로 ‘적대적 여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여론의 힘을 빌어 교회를 국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공평 과세라는 여론으로 밀어부친 종교인과세, 코로나 방역이라는 국민적 염원을 바탕으로 하는 공권력의 예배 관여, 평등한 세상 구현이라는 여론에 편승한 차별금지법 추진, 법적 정의 실현을 내세운 가이사 법정(법원)의 노골적인 교회의 자율성 무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여론몰이를 앞세운 낙태법 폐지, 문화 보호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빌미로 하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파적 재정지원 등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여론 형성의 전진기지인 언론을 통한 기독교 혐오, 안티 기독교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나 천주교와는 달리 기독교 하면 국민의 마음에는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교권다툼과 분열’, ‘재정전횡’, ‘공격적 선교와 독선’ 등 부정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교회는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젊은 이들의 교회인 대학교회를 시무하는 저에게는 피부로 와 닿습니다.    교회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려면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뱀의 지혜 이상으로 교회가 지혜로와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교인 개개인이나 특정 교회만이 아니라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명령일 것입니다.    교회가 어둠의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맞설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교회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안과 일꾼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대응하기를 기도합시다. / 한국교회법학회 회장, 중앙대학교 대학교회 목사, 명예교수, 전 부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7-12
  • 발달장애인의 연주로 ‘행복’을 전한다
    병마와 싸우는 환우들에게 음악봉사로 ‘위로’와 ‘사랑’을 전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들로 예술단구성해 활동   ⃟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모습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는 청소년들과 주민, 그리고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이다. 악기연주를 통하여 청소년들의 성취감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취약계층 청소년들, 시니어세대, 다문화가정의 자녀들과 함께 교류한다. 또한 한 부모 가정 아이들과 함께 마을 행사에 참여하여 지역문화와 연계해 연주를 함으로서 청소년들과 주민이 함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오케스트라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지난 2017년에 창단됐으며, 소수의 일반 청소년과 다수의 사회적 약자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무료 레슨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삶의 원동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이렇게 배운 청소년들은 다시금 어르신 기관, 지역마을 행사, 주민센터, 구청 등을 통하여 음악 무료봉사와 아울러 천연 수제비누를 만들어 전해 드리는 행사를 해마다 20~30회나 진행하며 선한 영향력을 널리 펼쳐 왔다. 아울러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리플씨앗소리'로도 나눔을 넓혀 왔으며, 이곳에서는 발달장애의 특성과 관심에 맞는 악기를 선정, 배움을 줌으로써 장애를 극복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도록 도와 왔다.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의 주재련단장(공감예수마을교회 반주자, 사진)은 “2016년에 구청에서 실시하는 지원 사업으로 선정되어 취약계층과 발달장애인들에게 적성과 관심분야에 맞는 악기를 선택하게 하여 지도하면서 봉사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업이 1년 단기사업이다 보니 더 이상은 지원을 받을 수도 없고, 그토록 행복해 하는 이들을 내 보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껴안은 이들과 아무 지원 없이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2017년 1월부터 비영리단체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단장은 “한 장소에서 두가지 일을 할 수 없다하여 운영하던 음악학원마저 폐업신고를 하고 비영리단체인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만을 현재까지 이끌고 오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보증금은 모두 소진되고 임대료까지 지불하지 못하게 되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했다. 주단장은 이런 사면초과의 상황에서 갈 곳이 없어 서울시의원 한분에게 무조건 편지를 썼다고 했다.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칠 사람이 있으면 저는 여기서 이 일들을 그만 두겠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면 제가 돌보겠으니 장소만 빌려 달라”는 주단장의 읍소에 서울시의원은 능동 어린이 대공원을 기존 사용자와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코로나발생 이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공간을 사용 못하는 것은 리플리히의 모든 연습과 연주일정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실망은 엄청났다. 리플리히단원들은 잠정적 휴식의 시간을 가졌으나, 발달장애인들 경우에는 쉴 수가 없었다. 주단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옥탑방에서 보면대 몇 개, 전자 피아노, 첼로3대 만을 가지고 모여 연습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부활주일과 군종모임, 기독교100주년 기념관 연주회때 나눠 드리려고 천연수제비누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만 불이 나서 모든 가전제품과 악기 등 모든게 재가 되어 버렸다. 경찰차와 소방차 수십 대가 와서야 불이 소각되고 모든 전원과 수도관을 막은 상태로 1층 3층 사람들은 구청에서 마련해 준 모텔로 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며 주단장은 그 당시의 막막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주단장은 “우리는 후원을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면 된다.”라고 말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들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지켜 보았던 대한민국 리더스포럼 박창수 대표는 “장애인 청소년들이 장애를 극복하며 아름다운 연주를 보여줘 감동적인 무대였다”,며 “특히 장애인을 두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함께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이런 면에서 리플리히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힌 멋진 공연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한국범죄퇴치운동본부 범죄예방위원회 윤태한 상임대표도 “장애인들이 저희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 봤다.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운율이 되고 하나의 노래가 탄생했다”며 보는 자체로도 뿌듯했으며, 이들의 공연이 성공할 것임을 예감했다고 피력했다.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딛고 다시 모인 발달장애인들만의 명칭을 ‘리플리히 거북이 음악예술단’이라 칭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단장은 “리플리히 거북이 음악예술단원은 모두 발달장애 2급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고 대화는 잘 못하고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오래 그리고 끝까지 간다.”라고말한다. 또한 “첼로의 네 줄을 긋는 연습을 3년동안 했다. 모두가 성인 연령이지만 생각과 마음은 아직도 어린 아기이다. 긴긴 세월 연습한 솜씨를 이제는 심신이 지쳐있는 환우를 위해 우리의 웃음과 함께 우리의 정성이 담겨있는 마음과 음악으로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장거리 음악여행을 떠난다.”며, ‘7명이 떠나는 행복한 음악연주 여행’을 말했다. “우리 친구들은 혼자서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이다. 아침 10시 가가호호 방문하여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 속초 민박집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마지막 연습을 한다. 부모를 떠나 밖에서 자본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조금씩 적응도하고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들의 공연은 지난 8일 강원도 속초시 뉴스타트센터에서 있었으며 놀라운 감동을 전했다. 주단장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약자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라는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문화적으로 변방에 있는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즐거운 기회를 주고 싶다.”라는소망을 피력한다. 또한 주단장은 “화재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당장 갈아 입을 옷조차 없어진 현실에 마음이 막막했는데, 순간 ‘아 맞아 내겐 리플리히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시편121편’말씀을 전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최헌정 기자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7-09
  • 응답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기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코로나19는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을 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은 눈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물의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고통의 순간도 동반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중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통곡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의 응답을 이사야 38장 5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과 회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는 지난 3월 7일 의정부 광명교회에서 시작해 6월 27일 새에덴교회에서 마무리하며 프레어어게인(prayer again) 기도운동을 했습니다. 전국 9개 권역에서 기도운동을 했습니다. 또한 제58회 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다시금 강단을 눈물로 적시는 기도운동이 힘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김종준 목사)는 7월 8일 오후 2시 꽃동산교회에서 한국장로교회의 날 기념예배를 개최하면서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할 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위기를 만나면 항상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지금의 위기도 눈물의 기도를 통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코로나19 정국 속에도 이처럼 잇따른 기도회와 예배를 개회케 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용단 있게 기도회와 예배를 개회한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   /예장 합동 총회 총무·상암월드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7-09
  • 인권과 주권
      오늘날 한국 사회와 정치의 화두는 ‘인권’이다. 그래서 ‘여성인권’, ‘인권 사각지대’란 말도 있고, 〈인권변호사〉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인권이란 말로 지경을 넓혀 세력을 크게 만들어 정권도 창출하고 대통령들이 되었다. 급기야 지금의 정부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우산아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군사, 종교를 두고 그것을 국민통제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인권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이다. 그런데 인권이란 말의 뜻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바로 주인이며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이다.   인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권’이다. 주권이란, 말 그대로 ‘주인 된 권리’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이란 말도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권에 대한 이해가 일반인의 생각과 다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다. 불신자나 비중생자가 볼 때는 참으로 생뚱맞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주권사상은 이 세상 어디든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우주는 우연히 생성되어 어찌어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인간이 땅위에 주인이므로 인간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이 우주와 세상은 주인 없는 황량한 공간이 아니고, 태초에 영존하시고 유일하신 인격적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데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우주와 세상의 주권, 즉 주인 된 권리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영적전쟁의 최전방에 서 있다. 불신세력들은 인권이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무기로, 모든 정치행각을 합법화하고 사회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영적 쓰나미에 맞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참된 인권과 하나님의 영역주권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전 총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6-27
  • 6.25사변, 상기, 기념할 건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하고 치열했던 전쟁은 6·25사변이다. 세계적으로 역사에 남을 『한국전쟁』 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엔(United Nation)의 16개국 우방들이 참전해 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와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를 비롯한 필리핀까지 그야말로 우리의 우방 나라들이 참전하여 우리 이상으로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쳐 싸워준 한국전쟁, 6·25사변이었다.   6·25사변이 있은지 금년은 71년째를 맞는다. 71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차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화를 이루어냈으며 경제적으로도 시장경제의 안착으로 세계에 빛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71년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1인 독재 체재하에 경제는 더 어렵고 인권과 주민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졌으며 3대 세습으로 더욱 고립화된 현실이다. 오직 핵무장을 통한 체제 유지를 고집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반도의 긴장은 남과 북만이 풀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6·25사변(한국전쟁) 71주년을 맞으면서 그 당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했던 세대는 6·25사변의 뼈아팠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몸서리를 치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주일(일요일) 새벽이었다. 자다가 홍두깨로 한 대 얻어맞는 격으로 우리는 불법남침을 받은 것이다. 전방은 쉽게 탱크에 짓밟혔으며 속수무책으로 서울도 빼앗기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였고 피난을 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날들을 다시 생각하며 해마다 호국의 달 6월이 되면 특별히 6월 25일이 되면 6·25사변, 한국전쟁을 다시 상기(想起)하자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사변(事變)이란 “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없이 무력을 쓰는 일”이라고 하였고 상기(想起)란 “전에 있었던 일을 도로 생각해 냄”이라고 하였다. 6·25사변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 모든 국민들은 6·25사변을 상기해야지, 기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6-20
  • 주님의 마지막 경고, 회개하라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을 믿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분부하셨으나 대부분 불순종하고 롯의 사위들처럼 인류 종말의 도래를 농담으로 여기며 지나쳐 버린다. 하나님은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통회자복을 하면 용서해 주시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끄는 성군이 되게 하셨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는 어린 십대에 방탕함과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어거스틴이 후에 성경을 읽고 심령에 찔림을 받아 통회자복을 함으로 용서를 받았으며 후에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다윗이나 어거스틴이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특별한 인물로 쓰셨다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고, 다만 죄를 회개치 않은 사람은 결국 거의가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죄를 짓고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약간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후회하는 정도에 그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소수의 사람은 지은 죄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를 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같은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두고 각각 배신하는 죄를 지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보면 1907년 1월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목사가 회개의 고백을 하자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들 각자가 자신들이 지은 추악한 죄를 토해내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회개와 부흥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적으로 성령의 불이 번져 나가면서 한국이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가 없으면 죽는다. 회개하면 천국가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만들고 천국가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주님이 우리시대에 마지막 경고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1-06-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