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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1
      최경환 공동대표   참된 신앙은 교회에서만이 아닌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제자도의 신학을 넘어 이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 공공신학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국내에도 이제 조금씩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먼저 공공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공공성은 어떤 의미이며, 기존에 신학의 한 분과로 다루던 기독교윤리와 무엇이 다른지 설명해 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성은 사적 영역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대부분은 사적인 신앙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을 개인의 신앙체험이나 내면의 영성으로만 설명한다든가, 조금 더 확장하면 교회중심주의로 이해하려는 경우가 많다. 분명 신앙의 어떤 부분은 사적이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신앙의 공적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한 명의 시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앙은 단순히 골방이나 교회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반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공적이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후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학의 제반 문제들을 다룬다. 여기서 공공신학은 현대사회 속에서 민주적인 삶을 떠받치고 있는 활동 영역, 즉 ‘공론장’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이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 자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통해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믿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공적 영역으로 나가야 하며, 이 세상의 영혼과 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공적인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 교회, 신학은 항상 세상과 관련이 있고, 구체적으로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 즉 복음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삶, 그리고 인류애 전체를 포괄한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공공신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는 세상, 정치, 시민사회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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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9
  •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배덕만교수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근본주의·반지성주의의 실수와 기독인의 올바른 선거  한국 개신교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갖는 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특정한 정치집단이나 정치적 성향과 배타적으로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강력한 반공사회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한의 우익정권에 적응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본질과 같은 흐름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보편적인 형태, 즉 성경적으로 정통성에 선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누구만의, 누구만을 위한, 특정 정치성향을 지지하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와 이념의 갈등 속에서 특정한 진영에 서 있는 기독교가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고 제3의 지대에서 중재하고 통합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역사를 견인해 나가는 자리에 서야 한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본래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보통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비평학,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고민으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신학적 근본주의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윤리 문제가 파생되고, 정치경제적 문제와 연동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본주의는 신학적 문제(성서무오설, 세대주의종말론)만 관심을 갖는데, 윤리적으로 가니까 복제문제, 낙태문제, 동성애문제가 이슈가 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여기에 반공, 친미가 한국 근본주의에서 중요한 아젠다라고 다뤘다.   오강남교수(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는 모든 종교는 심층과 표층이 있다고 말한다. 보다 진리를 추구하는 차원이 있기도 하지만, 종교의 힘을 빌려 현실 문제 해결하려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의 상당수가 후자, 표층적 종교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출발했는데, 성서비평학이나 진화론, 과학의 발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학문의 장에서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신학이 무신론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라고 봤다. 세상의 학문적 발전을 악마의 궤계로 폄하했다. 그래서 일반대학 내의 신학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과 교리만 가르치겠다는 ‘성경학교’ 혹은 ‘성경대학’에 진학하고 목회자로 사역했다.    기독교 본질에 대한 공부필요,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 이런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세상 학문을 비난하고 과학적 성취를 반기독교적이라고 가르쳤다. 미국의 경우 보수적인 정권의 지지자 중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교육받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것들이 먹혀들어가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폐해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본주의적 신앙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약화시키는 근본주의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신앙적 기준에서 행동할 수 있을까. 결국은 공부다. 한국 현대사와 한국 기독교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공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마치 진리인 듯 뿌려지는 기도제목 이라는 명목의 가짜 뉴스 등에 반대되는,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노력들이 교회와 단체마다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계몽시킬 책임은 목회자와 학자들에게 있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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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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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신학] 위기의 한국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문화공동체
      김선일 교수                                                   오직 교회만이 자신들 밖의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복음의 문화와 구원의 문화가 교회 내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문화의 확립을 토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핵심 실천인 선교와 전도의 문화가 조성된다고 볼 수 있다.  ‘선교’의 원래 뜻은 세상으로 보냄 받음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도는 개인의 회심을 목표로 한다. 선교는 세상에서 복음을 구현하는 삶이라면, 전도는 그 복음에 기초한 개인을 위한 구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여성 선교학자 데이나 로버트(보스턴대)가 비유한 것처럼, 선교와 전도는 몸과 심장의 관계와 같다. 선교가 총체적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전도는 생명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심장과 같다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선교 사역에는 교육, 의료, 환경운동, 정의구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교적 실천들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이 없이 선교는 지속적인 추동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전도와 선교의 유기체적 이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는 추동력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선교적 방향성을 겸비하게 해준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나 레슬리 뉴비긴 등에 의해서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세상과 이웃에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참여라는 인식을 기초로 최근 선교적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선교적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에큐메니컬 선교운동에서 기본 착상을 빌려온 것은 맞지만, 복음주의 권의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세상-교회라는 구도에서 의존하지 않고, 전통적인 하나님-교회-세상이라는 구도를 확대 갱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은 하시는가?’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던진다. 선교적 교회론이 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루며, 하나님의 선교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선교적 교회론은 선교적 문화, 즉 선교적인 공동의 생활 양식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에게는 선교적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다”라는 심오한 선언을 남겼다. 나치에 항거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회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가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리듬이 지역과 이웃으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선교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위한 몇 가지 선한 실천들을 간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타인을 향한 관심과 환대의 리듬이 형성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건물과 집회 지향의 삶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웃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이 아닌, 소그룹과 공동체가 함께 헌신하고 상상하며 참여하는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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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웨슬리신학연구소서 3월 설교연구모임
      ◇서울신학대 웨슬리신학연구소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김성원교수)는 지난 6일 이 대학과 온라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하여」란 주제로 설교연구모임을 진행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주제와 동일한 제목의 존 웨슬리의 설교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모색했다. 특히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소 소장인 김성원교수는 “성경을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다. 존 웨슬리 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주제로 설교한 것은 성경말씀에 충실한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면서, “웨슬리목사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발견한 윤리적 교훈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즐거워하라고 하는 마지막 권면은 우리에게 특별히 귀중한 영감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파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라는 교훈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의 더욱 깊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동행이며 교제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면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를 어디에서나 감찰하시지만, 그 눈은 우리를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하고 구원하시려는 선한 목자의 눈길임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편재는 궁극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면서,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이며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토의시간에서 강춘이전도사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웨슬리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며 성령님의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최병은목사는 “당장 강당에 올라가서 그대로 읽고 전해도 웨슬리의 설교는 현재성을 갖고 있고, 설교를 읽을 때 감동이 있으며 역동성이 있다. 코람데오의 신앙은 요셉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코람데오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은 주님과의 독대시간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는시간을 통해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류재성목사는 “오늘날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적용과 질문들이 필요하다”면서, “웨슬리가 편재성에 대한 설교를 당시 18세기 영국사회에 대한 것으로 적용했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를들면 소외, 불안, 분열, 갈등 등을 겪는 자들에게 그들 가운데도 편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우리는 전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류박사는 “편재하심은 부활신앙에도 중요한데, 이 부활신앙은 도마와 막달라마리아와 같이 경험될 수 있다”. “예수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가 있는가 하면, ‘나의 몸을 만지지 말라’라는 명령을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의 경험을 강하게 체험한 것이다. 이처럼 편재하심이라는 것도 손에 쥐는 것(도마)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어줌, 비어주는 것(막달라마리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교계종합
    • 일반
    2024-03-10
  • 사단법인 느헤이먀 사역을 소개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신학 연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 구현과 한국교회 발전과 개혁에 헌신   사단법인 느헤미야(이사장=이문식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이란 비전으로 2010년 시작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성장해, 2019년에 공신력을 가진 단체로 법인화된 이름이다. 이 단체는 처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퇴보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던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며,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개의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무리의 사람들로 시작한 움직임이 이제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다양한 과정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배우고자 몸부림치는 동역자들로 확장되고 있다.   창립 당시 기독연구원은 한국교회가 연약해진 이유가 신학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후에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 역시 필요하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이제는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교의 입문 과정부터 신학대학원의 석사 수준의 다양한 과정이, 학식과 인격에 깊이 있는 교수진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기독연구원은 매 학기제로 수업이 진행 중이며, 진지하고 심도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느헤미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명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 ’를 구성하게 된 과정이다. 교회협의회는 기독연구원의 신학적 성과들을 공유하면서 각 교회 현장에 적용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기독연구원에서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게 될 목회자 후보생들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여, 바른 목회자로 세우는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단체는 평신도를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무장하여 교회개혁의 주체로 세우는 일과 더불어,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일꾼들을 안수하고 잘 훈련시켜, 각자의 소명에 맡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약해져 가는 한국교회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명에 지속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와 ‘교회협의회 느헤미야’라는 두 날개로, 하나님나라와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 단체는 △교회 및 단체, 교육기관의 연합사업 △전도, 국내선교외 사회선교 △교회개척 사업 △신학교육 및 목회자 재교육 △남북통일사업과 남북교회의 협력사업 △소속기관의 권익보호와 법률적 보호 △성서연구와 교육 및 보급 △청소년 및 청년 선교사업을 주요사업으로 헌신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이 작은 사역의 한 걸음이 한국교회의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우는 귀한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 사역에 동참할 교회와 성도를 초청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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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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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4)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께 오는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마태복음 5~7장이 산상설교라면, 마태복음 8~9장은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한다.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마태복음 8장이고, 바로 그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이야기이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 보른캄과 헬트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론, 제자도, 신앙’을 보여주는 것 외에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수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백부장이 직접 예수께 나아와 간청을 드린다. 이것은 인종 교차적인 관점에서 유대인에게 이방인 선교를 고취하려는 의도이다.   이와는 달리 같은 치유 이야기 같지만, 누가복음 7장은 백부장의 ‘하인’이라 단어 대신에 ‘종’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백부장의 종이 다름 아닌 노예라는 사실을 부각한다. 마태복음에서 하인은 유대 사회에서 아랫사람을 의미하지만, 종은 그보다 더 낮은 계급 곧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통용되던 노예를 연상시키는 단어이다. 노예 신분이니까 무시할 수도 있지만, 소외된 사람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누가복음의 관점에서 훨씬 더 적나라하게 종을 살리려는 백부장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백성의 장로들과 친구들을 차례로 보내면서 종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이들은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다. 이것 역시 인종 교차적인 관점에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유대인 선교를 고취하려는 의도이다.   예수말씀은 마태복음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 백부장이 그에게 왔다. 그가 간청하여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나의 하인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겠다”고 한다.   예수의 응답은 파격적이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는 표현은 단순과거 분사의 형태로 일회적인 사건을 강조하고, 또 미래시제는 미래의 즉각적인 응답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는 백부장의 간청이 있자마자 예수께서 가셨고, 그 치유의 순간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순간에 미래의 사건으로 응답 될 것이라는 아주 미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예수의 화법은 백부장의 하인을 살리신 일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유하는 일이 인간사에 흔한 일인가? 아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이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 바로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바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선언한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서가 치유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당장 코앞에 가까이 계신 분으로 현현하신 놀라운 사건을 보도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도리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반복적으로 비하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과거에 한국교회가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유물론자들인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면, 이제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모독하는 이슬람의 총공세에 교회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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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한국기독교사연구원서 허정윤박사 발표
      국내활동 한계에 국외망명 결정하며 독립전쟁론 채택 “신민회 ‘자유문명국’에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이 내재”     한국기독교사연구원(원장=박종현박사)은 연구원 창립 22주년을 맞아 지난 6일 한국기독교사학회와 함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권 평박사의 사회로 시작한 이날 발표회에서는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소·사진)가 「신민회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일고」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조직으로 신민회의 창립목적은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었다. 이에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는 국내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망명을 결정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했다. 망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간부들을 대량 검거했다. 이에 대해 허박사는 “그 이후에 신민회 발기인들에게 닥친 일제의 탄압과 망명지에서의 현실 속에서 ‘독립전쟁론’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되었다”며, “그 결과는 신민회의 분열로 나타나면서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4번의 분열을 주목했다.    첫째 단계의 분열은 1차 망명자 그룹의 청도회의에서 일어났다. 허박사는 “여기서 안창호의 점진파와 유동열의 급진파가 대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급진파의 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적인 제약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둘째 단계의 분열은 이동영이 가족을 국내로 돌려보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을 때 일어났다. 허박사는 “그곳에서 이동영은 이상설과 합류하여 대종교인으로 개종하고 말았다”며, 종교적 분열을 시사했다.      셋째 단계 분열의 주인공은 이동휘였다. 허박사는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 군옥에서 남모르게 그를 구해준 하바로브스크시 볼셰비키당위원장 김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당위원장이 되었다”며, “이를 계기로 그는 신민회와 기독교를 완전히 버리고 볼셰비키즘으로 기울었다”고 설명했다.  넷째 분열은 양기탁에게서 촉발됐다. 허박사는 “양기탁은 통천교를 창시하고, 선언서에서 이는 ‘기독교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며, “종교는 ‘자국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허박사는 “3.1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에 신민회 발기인들을 포함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며, “이때에도 신민회의 급진파와 점진파의 독립운동 방법론이 임시정부를 분열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 ‘좌우대립’이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좌우대립 문제는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며, “그것이 임시정부의 정치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고, 그 존재와 권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패망 후 승전국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한반도에는 분열된 2개의 국가가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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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3)
      예수의 첫 설교는 “그가 이 말씀을 끝마치셨다. 그는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 구절로 짤막하게 예수의 첫 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에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에는 당시에 약 204개 정도의 도시들이 있었다. 첫 설교 이후에 예수의 활동무대는 공생애 사역의 전초기지인 가버나움으로 옮겨진다. 갈릴리 공동체의 활동무대 역시 가버나움에서 다시 출발한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1,700명 정도의 인구가 모일 만큼 갈릴리에서 분주한 항구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있다가 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의 일행을 위해 수종을 든 이야기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다른 병자들과 고침을 받은 이야기에 묻혀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8장 14~17절과 마가복음 1장 29~34절을 자세히 비교하여 읽어보라.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장모 사건에 앞서서 이미 제자들이 부름을 받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곧 베드로도 이미 제자로 부름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그의 장모는 베드로 때문에 특별히 예수의 고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 38~39절은 짧지만 두 복음서와 다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5장에 가서야 비로소 나온다. 이 점에서 4장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을 받은 사건은 아주 특별하다. 고침을 받은 여인이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드니라”(39절)는 표현을 통해서 아직 남성 제자들이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여성의 헌신을 통해 제자도의 핵심 기능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종들다’란 단어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디아코니아의 동사형인 디아코네오이다. 바로 남성 제자들이 봉사의 제자도를 감당하기 이전에 여성의 리더십을 통하여 봉사의 원리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건이 예수의 공생애 동안에 자주 일어나는데, 그 출발점이 가버나움이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베드로 장모의 사건을 다루면서 “회당에서 나와”(마가복음 1장 29절; 누가복음 4장 38절)라는 구절을 통해서 가버나움 회당과 이 사건을 연결 짓고자 한다. 이것은 가버나움에서 회당이 지닌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사건 바로 직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며 하인을 고친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사실상 공관복음서는 모두 가버나움을 중시한다.   왜 가버나움이 중요할까?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공생애를 이어가신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뿐만 아니라, 동서로 움직이는 예수의 이동경로에서 핵심적인 장소이다. 마가복음은 ‘건너편’(헬라어로 페란)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신 것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심지어 마가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마가복음 6장 30~37절)은 유대인을 위해서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마가복음 8장 1~10절)은 이방인을 위해서 행한 기적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예수의 공생애가 미치는 활동영역은 가버나움을 넘어서 이방 여인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의 고향인 헷 족속(히타이트)이 자리를 잡았던 페니키아의 해변가인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 또한 북으로 서부 시리아인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나간다. 나사렛이 나자라 예수의 진원지라면, 가버나움은 예수말씀의 중심지이다. 나사렛이 예수께서 자라신 곳이라면, 가버나움은 제2의 고향이다. 가버나움을 기점으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나아가신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에 가버나움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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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6
  • 정요석박사 ‘에드워즈의 언약론’ 발표
      구속언약은 삼위 안에서 구속을 이루는 특정한 수단·방법 “성부는 성자와 협약에 의해 성자에 대해 새로운 권리획득” 제 4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이 지난달 26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열렸다. 정요석박사(세움교회·사진)와 이상웅교수(총신대)가 강사로 나섰다. 이 중 에드워즈를 전공한 정박사의 발표에 많은 관심이 몰렸다.   정박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약론」이란 제목의 발표에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그의 언약신학을 분석했다. 에드워즈는 “사람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일에 관하여 삼위일체의 위격들 몇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있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여 명백하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구속언약은 “삼위의 존재의 질서 하에서 구속을 달성하는 특정한 방식과 수단들”이다. 정박사는 “이미 삼위의 존재의 질서 하에서 결정된 삼위의 권한을 에드워즈는 구속언약에 의하여 새로이 결정되는 것과 면밀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점을 정박사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즉 “삼위일체의 경륜에 의하여 이 세상의 율법수여자와 심판관과 처분자가 되는 권한은 성부에게 주어져 있는데, 구속언약에 의하여 이 권한이 성자에게 맡겨져, 성자는 성부를 대신하여 이 세상의 주와 심판자가 된다”며, “또 성부는 영원한 구속언약을 시작하는 이이고, 첫 번째 운동자이고, 수장으로서 모든 면에서 행동한다”고 말했다.   정박사는 왜 구속언약이 필요한지에 대해 “성부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들에게 그들의 경륜적 위격을 침해하지 않는 것들은 단지 성부의 경륜적 특권만으로 그들에게 지시할 수 있지만, 신적 위격들의 영광을 침해하고 밑도는 것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협정에 의하여 이것을 행할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 한, 다른 위격들에게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자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겪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일들은 성자의 신적 위격의 영광을 침해하고 밑도는 것들에 해당하므로, 성자가 이렇게 하겠다고 성부에게 자유롭게 협정하여 주지 않는 한, 성부는 성자에게 성부의 특권으로 이것들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박사는 “성부는 성자와의 협약에 의하여 성자에 대해 머리와 권위가 되는 새로운 권리를 얻어 그에게 위격 밑에 있는 것들을 지시하고, 또 그 협약에 의하여 성부는 성자에게 성공과 보상 등을 주는 새로운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고 요약했다. 그래서 위격들의 영광과 존엄에 밑도는 것이 사람을 구속하는 데 요구되지 않는다면, 구속언약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구속언약에 의한 두 위격의 이러한 종속은 비록 종류에 있어 새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부와 성자의 경륜적 질서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구속언약에서 성부가 성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말한다”고 정박사는 지적했다. 그 결과 “에드워즈가 위격들의 영광과 존엄에 밑도는 것이 사람을 구속하는 데 요구되기 때문에 구속언약이 필요하다고 본 점은 그 주장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구속언약의 필요성에 대하여 매우 독창적으로 잘 설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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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6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2)
      예수말씀은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라고 안타까워하면서 행함을 일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말 속담이 있듯이 이러한 예수말씀에 대해서 주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가장 예수의 가르침을 가깝게 따르고 있다(야고보서 2장 14~26절). 야고보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예수말씀을 찾아보면, 예수말씀의 평행귀가 복음서 이외에서 야고보서에 가장 많이 발견된다.  ‘주여, 주여’라는 부름말은 흔히 ‘주여 삼창’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주여 삼창’이 유래된 구절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다. 다니엘 9장의 기도를 읽어 보라. 특히 다니엘 9장 19절의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에 ‘주여 삼창’이 나온다. 인간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행동을 촉구하는 간청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일방적인 간청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말씀은 놀라우리만치 인간의 행동을 촉구하고 나선다.  예수말씀은 “나의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모든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시내…가 저 집에 밀려왔어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시내…가 저 집에 들이쳤는데 그것이 곧바로 무너졌고, 그것의 무너짐이 컸다”고 이어진다.  마태복음은 예수말씀의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이란 전승을 그대로 따르지만, 누가복음 6장 49절은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왜 이렇게 예수말씀의 중요단어가 반석에서 흙으로 변경된 것일까? 마태복음이 산상설교(마태복음 5장 1절)이고 누가복음은 평지설교(누가복음 6장 17절)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태의 유대인이 유대산지의 반석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가의 로마인이 살던 드넓은 평지를 중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평지의 흙에 집을 바로 짓을 수는 없기 때문에 ‘주추’를 두 번씩이나 언급하면서(누가복음 6장 48~49절) 집을 짓는 사람이 나름대로 수고를 하였지만, 역시나 ‘큰물이 나고, 탁류가 부딪칠 때’(48~49절) 집이 곧 무너지게 된다.  우리말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인간의 경영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시편 127편 1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면서 인생이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을 일깨운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설교로(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누가복음 6장) 적용되었지만, 예수말씀이 ‘반석 위에 세운 집’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사사기 55장 8~9절)  인간은 미래가 불안한 나머지 모아둔 재산을 허비하며 부질없이 신접인도 찾아가서 점도 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집 안에 부적도 들이고 심지어 우상을 모시기도 한다. 치성을 드리며 기도를 올리지만, 제 마음이 차지 않아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까지 한다. 모두 신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의 발로이다.  예수말씀은 기껏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말씀하신 분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행동으로 보이며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것을 주문하신다. 당장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한 대로 행하라’는 말도 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야 할 차원을 일깨우는 말이다. 예수말씀은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한국교회가 기도는 잘하고 말씀을 듣는 데는 열심이지만, 행동과 실천이 미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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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주동홍박사, 개혁교회500주년 기념 연구발표
    ▲ 개혁교회 500주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 주도홍박사가 츠빙글리 연구를 발표했다.   츠빙글리는 루터주의자로 불리기보다 바울주의자로 호소 “하나님은 츠빙글리를 스위스에서 소중하게 사용하셨다”      2019년 개혁교회 500주년을 맞아 주도홍박사(전 백석대 부총장.사진)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여기서 츠빙글리가 ‘독자적 종교개혁자’란 사실이 강조됐다.    주박사는 두 가지 면에서 츠빙글리의 독자성, 즉 루터와의 무관함을 들었다. 첫째는 1519년 츠빙글리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확신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주박사는 “이는 루터와 츠빙글리와의 정신적 무관함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때는 츠빙글리에게 루터의 사상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시점이다”고 강조했더. 둘째는 츠빙글리가 1516년, 1519년의 자신의 새로워진 설교를 제시하는 점이다. 주박사는 “이 시점이야말로 종교개혁으로의 공개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츠빙글리가 자신의 독자적 종교개혁 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루터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종교개혁이 이뤄졌음을 증명하고자 함이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관계는 몇 차례의 변화를 보여준다. 주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첫 번째 단계는 1518년 가을에서 1520년 여름까지로 “루터에게 매료된 단계”이며, 둘째 단계는 1520년 여름부터 1522년 초까지로 “교회 정치적 이유로 루터와 조금은 거리감이 있어지는 기간”이고, 셋째는 1522년부터 1524년까지의 단계인데, 신학적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루터와의 조심스러운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고, 마지막 단계는 1525년에서 29년까지인데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 “성찬에 대한 구별된 이해로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주박사는 1522년 이후 1524년까지를 주목했다. 츠빙글리가 루터와의 신학적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게 되는 시기이다. “우리와 함께 루터는 공동으로 복음적 교리를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파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적이다”는 츠빙글리의 말에 주목할 것을 주박사는 당부했다.    츠빙글리의 <67개 논제에 대한 해제>(1523년)는 루터와의 관계를 직접 말하는 문서이다. 주박사는 “18조에서 츠빙글리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밝힌다. 그는 루터를 ‘하나님의 성실한 종’,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전사’로 일컬으면서도, 자신을 루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는 사실이 아님을 밝히며 동의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주박사에 의하면 츠빙글리는 자신이 왜 루터주의자가 아닌지를 여섯 가지로 밝힌다. 츠빙글리는 △루터를 알기 전에 ‘오직 성경의 원리’를 실천했고 △오직 성경에만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교부들의 성경해석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중세교회와는 차별화된 오직 성경을 만방에 알리는 시점은 1519년이었으며 △마태복음 주석에서 주기도문 강해를 루터보다 앞서 출판했고 △교황청에서 취리히로 특사로 보낸 추기경들은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전에는 츠빙글리를 루터주의자로 정죄하지도 부르지도 않았고 △츠빙글리는 자신을 루터주의자라고 일컬음을 받기보다는 바울주의자 아니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호소했다 등이다. 이렇게 츠빙글리는 자신을 루터주의로 불리는 것에는 반박하면서도 루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마부르크 종교회의가 열렸던 1529년까지는 특히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루터와 츠빙글리가 날카롭게 대치했다. 주박사는 “이 기간에 츠빙글리는 루터와의 차별성을 내세웠는데, 루터는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조금은 분명하지 않은 여러 과정을 거쳤지만, 자신은 달랐다”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정수를 바로 터득하여, 교황권, 연옥설, 성인들의 조작된 중보기도를 거부하였”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츠빙글리의 사상이 전적으로 독자적이지는 않다고 주박사는 평가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특히 츠빙글리에게 있어 믿음 대신, 복음의 역할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심사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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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08-12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1)
      예수말씀은 “나쁜 열매 맺는 좋은 나무는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나쁜 나무도 없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 찔레에서 포도를 거두지 못하지 않느냐? 좋은 사람은 그 좋은 창고에서 좋은 것을 가져 오지만,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가져 온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그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고 한다. 예수말씀을 복원하면서 뒤에 나오는 ‘창고’라는 단어는 앞에 사용된 단어를 토대로 하여 추측한 것이다. ‘좋은 창고’는 ‘좋은 보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예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처럼 본질을 중시하신다. 교차대칭구조로 표현된 예수말씀은 자연의 이치가 창조주의 마음과 같아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순리를 말한다. 우리말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다. 예수말씀은 가시나무와 무화과를 그리고 찔레와 포도를 대조하면서, 뾰족한 가시나무와 찔레를 부드러운 무화과와 포도에 비유하신다. 우리말에 연결을 짓자면, ‘밴댕이 낯짝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뾰족한 가시나무와 찔레처럼 악한 말을 할 것이고,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화과와 포도와 같은 좋은 말을 할 것이다. 예수말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순리로 돌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창세기 1장 26~27절)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본질과는 다르게 역행하는 언행을 한다고 고발하신다. 사람은 ‘순리로 쓸 것 역리로 바꾸어서’(로마서 1장 26~27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창조의 섭리(창세기 2장 24절)를 버리고, 남자가 남자로 여자가 여자로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여”(로마서 1장 27절) 동성애의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를 ‘가증한 것’(히브리어 ‘토에바’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란 뜻)이기에 죽이라고 명령하신다. 레위기 18장과 20장을 읽어보라. 동성애자도 사람인데, 죽이라는 명령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진멸’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법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2세기에 마르키온이 진멸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구약의 하나님을 저급하고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구약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과오를 범하고 영지주의 이단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초기교회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헤렘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려는 창조의 본래 목적과 경륜을 외면하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그리고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음욕이 불태울 때, 이러한 동성애를 ‘가증한 것’ 곧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기에 죽이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시는 진멸법이다. 요즘 한국사회는 사회적 성과 제3의 성을 이야기하면서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성을 마치 양성평등처럼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성은 가기 결정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의 권리’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성은 아름다운 것이고 축복이다.  이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역행하고 성을 역리로 쓰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예수말씀이 좋은 나무와 좋은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보물과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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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5
  • 김영한박사, ‘예수의 윤리’ 연구 발표
    ▲ 김영한박사는 나사렛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윤리는 율법의 폐기가 아닌 완성임을 강조했다.   예수는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제시 율법은 성령으로 예수를 믿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완성 기독교윤리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것은 이미 구약 모세의 율법이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윤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온다. 이러한 문제를 예리하게 분석한 김영한박사의 연구가 나와 큰 관심을 받았다.  김박사는 “예수는 전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와 선지자가 가르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제시하신 것이다”며, “예수는 율법의 내면을 통찰하였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바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율법의 가르침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며,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이다”고 설명했다. 김박사는 “예수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 마음속에 점화되면 산상수훈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된다”며,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후히 빌려 줄 수 있다.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원수에 대하여도 단지 미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수 도 있다”고 말했다. 김박사는 중생한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래서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율법의 준엄한 심판 때문에 두려워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사도바울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은 성령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새 사람의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고 김박사는 설명했다. 이렇게 역사적 예수는 율법이 그가 보내실 성령 안에서 전적인 자발적 드림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성취됨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김박사는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아래 거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한다는 진리의 역설을 가르친다. 여기서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요구에 얽매어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가 인격으로 그 속에 계시게 될 때, 그 사람은 자발적으로 진리를 순종하게 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동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김박사는 “오늘날에도 인간들에게 불편한 계명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물타기 기독교인들’이 있다. 동성애 이슈가 그것 중 하나다”며, “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너무 강압적으로 반대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는 결단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그를 겸손하게 하신 ‘하나의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박사는 예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입법반대에만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공공선인 정의와 선행을 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며,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고 주장했다. 또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을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은 “성다수자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양심과 사회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박사는 이러한 반대운동과 더불어 선행운동을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김박사는 “성도와 교회는 사회적 소외자들, 이주민들, 탈북민들을 돌아보는 사회적 선행으로서의 아젠다를 실천하여 성도 내면에서 사회를 향하여 우러나오는 긍휼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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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5
  • 김영한박사, ‘예수의 윤리’ 연구 발표
    ▲ 김영한박사는 나사렛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윤리는 율법의 폐기가 아닌 완성임을 강조했다.   예수는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제시 율법은 성령으로 예수를 믿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완성 기독교윤리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것은 이미 구약 모세의 율법이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윤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온다. 이러한 문제를 예리하게 분석한 김영한박사의 연구가 나와 큰 관심을 받았다.  김박사는 “예수는 전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와 선지자가 가르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제시하신 것이다”며, “예수는 율법의 내면을 통찰하였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바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율법의 가르침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며,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이다”고 설명했다. 김박사는 “예수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 마음속에 점화되면 산상수훈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된다”며,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후히 빌려 줄 수 있다. 사랑의 능력을 가지면 원수에 대하여도 단지 미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수 도 있다”고 말했다. 김박사는 중생한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래서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율법의 준엄한 심판 때문에 두려워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경우는 사도바울로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은 성령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새 사람의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고 김박사는 설명했다. 이렇게 역사적 예수는 율법이 그가 보내실 성령 안에서 전적인 자발적 드림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성취됨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김박사는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 아래 거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한다는 진리의 역설을 가르친다. 여기서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요구에 얽매어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가 인격으로 그 속에 계시게 될 때, 그 사람은 자발적으로 진리를 순종하게 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율법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역동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김박사는 “오늘날에도 인간들에게 불편한 계명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물타기 기독교인들’이 있다. 동성애 이슈가 그것 중 하나다”며, “동성애에 대해 교회가 너무 강압적으로 반대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는 결단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그를 겸손하게 하신 ‘하나의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박사는 예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입법반대에만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공공선인 정의와 선행을 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며,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고 주장했다. 또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을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은 “성다수자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양심과 사회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박사는 이러한 반대운동과 더불어 선행운동을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김박사는 “성도와 교회는 사회적 소외자들, 이주민들, 탈북민들을 돌아보는 사회적 선행으로서의 아젠다를 실천하여 성도 내면에서 사회를 향하여 우러나오는 긍휼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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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5
  • 설교연구원서 ‘27주년 기념세미나’
     6명의 성경 전문 강사진들 목회에 도움되는 강의를 기획  “목회자·신학생들, 강의통해 큰 도전과 감동 얻길 바래”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원장=서창원목사·사진)은 8월 19일부터 20일까지 2일간 세곡교회(담임=박의서목사)에서 설립 27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하고, 「모세오경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란 주제로 6명의 전문 강사진들이 강의를 진행한다. 세미나의 강의들은 목회자들이 바른 성경이해를 바탕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광호목사(실로암 교회)는 ‘27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설교를 전하고, 「출애굽기 이해와 해석의 기초’」란 주제로 강의한다. 많은 저서들을 발간한 이목사는 이번 강의를 통해 개혁주의 입장에서 출애굽기의 장엄한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김두석교수(칼빈신학교)는 「창세기와 그리스도」란 주제로 강의하고, 황선우교수(총신대학교)는 각종 제사제도를 다루고 있는 레위기에 대해 「설교를 위한 레위기 연구」란 주제로 그 중심사상과 적용을 강의한다. 성주진교수(합동신학교 전 총장)는 「신명기의 보응사상과 설교」란 주제로 신명기의 ‘보응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강단에서 선포·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의한다. 강규성교수(한국 성서대학교)는 민수기에 대한 개괄적 이해와 설교의 실제에 대해 「민수기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로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서문강목사(중심교회)는 모세오경 전체를 「계명과 복음」의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동 연구소장 서창원목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이번 세미나에 참여하여 큰 도전과 감동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확신한다”며, “많은 이들이 세미에 참석하여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또한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자신의 목회에도 훌륭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접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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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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