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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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하나님의 딜레마(호세아 6장 1~3절)
       몇해 전 바둑기사 이세돌와 AI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있은 후, 우리에게 이제 AI는 삶의 영역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이 AI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율주행차로 하여금 피할 수 없는 기로에 서도록 하여 운전자나 보행자 간에 희생자가 발생하도록 가상의 상황을 연출하여 결정케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을 ‘Trolley Dilemma’실험이라고 합니다. 성도분들께서는 이런 기로에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실 ‘딜레마’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사용합니다. 딜레마의 뜻은 ‘진퇴양난에 빠지다’라는 뜻인데 조금 전 AI가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처럼 어떠한 손해를 보더라도 결국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서는 것을 ‘딜레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딜레마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도 딜레마에 빠지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다른 것은 딜레마의 해답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유난히도 호세아서에는 “벌하시겠다 용서하겠다, 죽이겠다 살리겠다, 심판하겠다 사랑하겠다”는 복잡한 심경의 변화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혹여나 변덕쟁이가 아니신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실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욥기 34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갈팔질팡 하실까요?   그것은 그분의 위치와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치상 판결하시는 분입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논쟁’은 법정용어로 마치 검사가 피고의 죄를 나열하는 듯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상 그분의 목소리를 불호령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딜레미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위치는 공의이신데 마음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그 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 1절은 이러한 주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에게 매를 드시지만, 다시 낫게 하신다는 것은 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완곡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자주 표현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말고 그분의 마음을 다른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리셨지만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것이 아닙니다. 찢으셨지만 함께 찢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찢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2절은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를 부활의 예표로 보기도 합니다. 다시말해 무엇으로 싸매실까요? 아들을 내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내주신 은혜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등학교 시절 거짓말 안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되도않는 거짓말을 해서 담임선생님이 시말서와 함께 부모님을 데려오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떨려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때 어머니께서 함께 울어주시고 용서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말 없이 가장 귀한 존재를 주셔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이라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생명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른 태도는 그분을 더욱 알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모습이 넘쳐나길 축원합니다./일산하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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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0
  •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소망(고전15:1~58)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의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사망 권세에 영원히 갇혀서 소망을 잃어버린 모든 인류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희망이다. 부활이 GOOD NEWS인 것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꼼짝없이,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삼일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또한 부활은, 세상을 장악한 마귀권세와 그의 하수인들의 힘과 계획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퀘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 세상 神인 악한 영들에게 비참하게 모든 것을 강탈당한 것(질병, 불신앙, 우상섬기는 일, 미래의 소망까지 빼앗긴 인생들)을 다시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大事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대사건이어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영성을 갖춘 영적인 존재, 즉,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이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먼 미래의 그 종말적 재림의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께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과 성도들이 부활의 큰 사건과 위대함을 너무 가벼운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킨 면을 안타까워해야 할것이며 더 크고 위대하게 선포하며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하게 타협하며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성도들의 죽음에 조금의 위안을 주는 단순한 일회성 절기로 소홀이 취급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성경적인 부활은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죄와 더불어 먹고 살았던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을 선하신 하나님께로 고정하고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20~58)/유향교회 목사·예장 합동개혁측 대전광역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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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설교] 최고의 역전 드라마, 부활
    김 학겸 목사    극적인 드라마를 보면 그 안에 반전이 있습니다. 인류 최고의 역전 드라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요20:1).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요20:2). 그리고 두 제자도 달려가서 빈 무덤을 보고 시체가 도난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열린 무덤은 그저 놀라운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걱정이나 열정도 그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요20:16). 마리아는 눈으로 볼 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귀로 듣고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리아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요20:21).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다음 세대가 부활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 받은 사명을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지 말고,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요20:21-22).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소유가 아닌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사명 받은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감과 죄책감 등으로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주신 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상처 입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명 감당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죽음 너머에 위대한 부활이 있었음을 믿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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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 [설교] 건축자들이 버린 돌
       성경 시편 기자는 시편118편 22부터 23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18편 22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면서 자주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약의 성경구절의 예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은 교만한 지도자들이고 모퉁이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은 이 돌이 쓸모 없다고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지을 성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재료라 생각하고 버렸습니다. 건축자들은 성전을 짓는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성전은 튼튼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재료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전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절 2절 “여기에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건축자들이 건축한 이 성전은 로마 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처럼 벽돌 하나도 남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사라졌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만이 존재할 뿐 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옮겨 다닐 수 없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성전이 되어 어디든 옮겨 다닙니다. 여기도 저기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이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성전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건축공사에서 제일 먼저 놓이는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하고자 하는 벽의 방향과 길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머릿돌 위에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건축 재료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따르고 믿고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 삶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다시 기적을 낳을 것입니다. 그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기적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인생이 풍요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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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달콤한 소통(사도행전 5장 38절에서 42절)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전에는 두려워하고 절망하면서 다락방에 스스로 유폐되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세주라고 목소리 높여 선포하기 시작했고, 앉은뱅이나 눈이 먼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소리를 높여서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분개해서 제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원로답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여러 번 보아왔듯이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하나님께서 곧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좀 두고 보자. 이렇게 제자들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채찍질한 다음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되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채찍 맞고 걸어 나오는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편해졌을 때 망합니다. 신앙은 마침내 부활이요 승리지만 그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생략한 부활·행복·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고난을 생략하면 기독교는 망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가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일만 되면 일을 시키거나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뚫고 교회 나오는 것은 매주 전쟁이었습니다. 때로는 빗자루로 얻어맞고 여성들은 머리도 막 잘리면서도 교회에 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교회 가는 것 때문에 아무런 고난이 없습니다. 다 편합니다. 교회에 와도 목회자가 쓴소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 나올까 봐. 결국, 희생이나 헌신 없이 달콤한 열매만 추구하게 되면 그 신앙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움직여지고 선교 공동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많은 성도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정상적입니다. 너무 합리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시간과 건강과 노동과 물질을 드리면 나는 당장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고 돈 쓸 곳이 여러 군데인데 못 쓰니 고통입니다. 근데 그 고통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은 거룩한 중독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어떤 고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전통입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달콤한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주민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2-05
  • [금주의말씀] 교회에서 찾을 영광
       신학교 재학 시절, 캠퍼스 안에 기숙하고 있던 학생들과 ‘뉴욕 곰탕집’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신학교로 돌아오면서, 차 안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드셨어요?” 모두들 잘 먹었다고 하는데 한 학생만 “아니요!”라고 답을 합니다. “왜?” 되물었더니, “짜장면이 맛이 없어요” “아니, 곰탕집에 갔으면, 곰탕을 먹어야지, 짜장면을 먹고 맛이 없다고?”하며 모두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C.S 루이스는 크리스천으로 회심을 한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교회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의식에서 시작 된 것으로 신경이 무척 쓰이는 ‘같이하기’ 행사였다”고 하며, 교회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개인적인 탐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크리스천의 삶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인간으로서,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여, 어디에 속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 안에 분명한 표징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에만 있는 그 무엇, 교회에서 찾아야 할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c-3절 말씀처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형’(transfigured)의 뜻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사회의 상황과 각자의 생활 속에 바쁘게 살면서, 예수님도 그 모든 영향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과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모인 교회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4-6절 말씀처럼, 성경 속의 인물·사건·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합니다. 7절에서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은 그동안 배웠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광된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입니까? 변화 산 자체가 특별하고, 유명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변화 산입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영광 된 교회입니다.   또한 2절에 ‘따로’, ‘높은’, ‘올라가셨더니’의 단어처럼, 우리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특별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 나를 따로 구별하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또 8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현실에 충실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된 변화 산과 교회에서, 생활 현실로 돌아와 충실 하십시오. 내 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소명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맛을 보았으면, 그 힘으로 내 삶이 영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세상에서, 일상생활에서 그 영광의 능력을 발휘하시길 축원합니다./목사·새빛다문화센터장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4-01-3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매일 경험하는 구원 (눅19:1~1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고 말씀하신다.   만약 의인을 찾아 상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 근처에 갈 수도 없기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명령한다.   새 사람을 입고 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여 구원받은 자로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첫째:진심으로 행동하라(1~4)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는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그저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에게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을 때 포기하고 돌아갔겠지만 돌무화과 나무에서 올라가서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깊은 아픔이 배여 있는 행동이다. 이러한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신다.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얼마나 담겨져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둘째:기쁨으로 순종하라(5~7)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이 아닌 돌무화과에 메마른 마음으로 올라가 있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양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개의치 않으셨고, 삭개오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매일의 삶에서 구원 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그 음성에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셋째:스스로 결단하라(8~10) 삭개오는 예수님이 먼저 명령하시지 않았음에도 할 일을 선포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임하였을 뿐 아니라 삭개오를 통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의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7~18)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 바로 서 있다면 행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은혜는 받았지만 아무 결단도 헌신도 없이 그저 더 많은 것들만 채워 달라고 요청만 하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여 받은 구원을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며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주변을 맴 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이 내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순간임을 기억하며 날마다 받은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들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18
  •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눅18:18~3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성경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말씀하고 있으며,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며 고백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주하는 오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임을 말씀을 통해 다시금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할 수 있는 것(18~21)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질문할 때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20절)는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야 한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에 능력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으로 주어졌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성장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할 수 없는 것(22~27)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   교회 생활 잘하고 말씀대로 살면 되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과 혹은 영생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신4:24)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는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내어 드리기 위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자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셋째:해야 하는 것(28~30) 베드로의 질문은 교만함이 아니라 헌신한 자의 당당한 자세임을 깨닫게 되며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이러한 당당함임을 느끼게 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자신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은 부끄러워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전이 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8~9)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제자의 당당함이 오늘 이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베드로는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고 있다.   마르다처럼 세상의 많은 일에 분주하여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중요한 것은 하나라고 할지라도 붙잡고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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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1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눅18:1~8)
    길목교회 주재훈목사    본문은 예수님이 기도의 자세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기도에 대해서 정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그저 자신의 감정을 쏟아 놓고, 한풀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실제적인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서 기도는 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올바른 기도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각자의 기도의 모습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  첫째:항상 하는 기도(1)  기도의 핵심은 “항상”(1절)에 있기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바로 기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의 모든 순간에 변함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항상 기도하기 때문에 낙심의 마음을 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주치는 일상의 삶에서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문제가 생기면 그 때가 되어서야 기도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라 선포하며 기도를 쉬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문제 때문에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모든 환란을 능히 이기고도 남는 힘을 공급받는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확신의 기도(2~5)  과부는 재판장의 성품이 어떻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귀찮도록 찾아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는 하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이심이라”(요일5:14)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고 계신다.  확신으로 기도하지 못할 이유를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는 분이시다. 기도는 한다고 하지만 응답의 확신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셋째:포기하지 않는 기도(6~8)  기도에 대한 비유의 결론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라 내리시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이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인데 의심을 품고 사는 자는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포기하지 말아야 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으로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노라”(사41:9)고 말씀하셨다.   기도의 응답이 이 땅에 호흡이 있는 동안에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며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솔로몬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지혜를 간구할 때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3:10)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된다. 반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고 분명하게 깨우쳐 주신다.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 기도가 나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응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7-04
  • 한 걸음만 더 (눅17:11~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나병이라는 질병이 있지만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을 통해 교훈하신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 걸어가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3,8).   말씀을 통해서 나는 어느 곳을 향해 발걸음을 딛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바라며 그 길이 과연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지 점검해 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옳은 길로 돌아서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소망의 한 걸음(11~13)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먼 곳에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과 할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두고 움직이는 사람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열 명의 나병환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은 언제나 녹록하지 않다. 충분히 좌절하게 할 만한 환경이며, 소망의 마음의 조차 품을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문제들에 붙들려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 안에 있을 때 소망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7:7)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오늘 우리들의 고백으로 삼으며 매 순간 내 딛는 발걸음은 절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향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둘째:순종의 한 걸음(14~16)  열 명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제사장들을 만나기도 전에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 우리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순종하며 따르기 전에 내 생각과 경험이 앞서기 때문이다. 엘리사를 찾아왔던 아람군대 장군 나아만의 기적은 순종에 있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왕하5:1~14).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경험하기 원하면서도 그 기적의 통로인 순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하나님은 먼저 순종을 할 수 있는 자인지 점검해 보시고 통과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감사의 한 걸음(17~19)  아홉 명도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다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병이 회복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 또한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감사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19절)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을 받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감사’이다.   성경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라 명령한다. 그 문에 들어가고, 그의 궁정에 들어가는 자격은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지만 궁극적인 완성은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고 고백한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시119:133)라고 간구하고 있다.   매일 나는 어디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가?   작은 한 걸음이라 할지라도 썩어질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한 걸음을 내 딛고 사는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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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6-27
  • 명품을 좋아하시죠?(딤후1:1~5)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품을 좋아한다. '명품'이란 말은 해외에서 '럭셔리'로 불리는데, '럭셔리'란 사치품, 호화품의 뜻이 있다. 우리나라에 럭셔리 브랜드들이 들어올 때 어감이 좋지 않아 거부감을 들게 할 것을 우려해 <명품>이란 단어로 바꾸었다고 한다. 기업의 마케팅전략인 셈이다. 원래 명품은 장인들이 수제로 만든 값어치 있고 희귀한 제품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명품을 몸에 지녔다고 해서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명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부부가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도록 하셨고, 만물을 다스리라 명하셨다. 이 다스림은 곧 가정에도 적용된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이 다스림이 정치(政治)이다. 아내에게도 다스림의 역할과 책임이 크고 중요하다. 아내는 윗어른, 시댁의 모든 식구, 남편과 자녀의 관계에서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 따라서 정치가 중요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가정, 온 식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부부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가정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가장(족장)이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였다.) 행복한 가정은 경건한 신앙의 명문가, 신앙의 명품가정을 이루어가는 데 있다.   자자손손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계승(계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된 부모로서 하나님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의 자녀로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1)자녀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 2)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 신앙의 승리자, 하나님 앞에 서 게 될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신앙의 성공자로 서게 되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딤후 1:3절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말씀한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영향을 입었다. “아이의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의 손을 세계를 흔드는 어머니의 손과 같다.”   하우스는 잠만 자는 곳으로 가정이 될 수 없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길은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세우는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신앙의 명문가, 신앙의 명품가정을 세워가는 일에 힘을 다하여 가족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1).   목회자란 것, 그 자체가 귀한 명예가 아닌가!(?) 작든 크든 장이란 직이 귀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빛내는 일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인지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두 가지 모두를 가지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이 같은 마음으로 총회를 섬겨왔고, 목회 정신으로 삼고 오늘에 이르러 목회 일선에서 퇴역을 앞두고 있다. 목회에서 퇴역하는 마당에 나의 퇴역사는 사무엘의 퇴역사로 대신한다. /천호동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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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4
  •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로마서1:1~32)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상태를 진단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그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입니다.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인 완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와 악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죄와 악이 있으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측 가능합니다. 철저히 이성적입니다. 오로지 죄와 악에 대해서만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죄와 악에 대해서만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죄와 악에 대해서 분노하실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신론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만 존재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광대하시며, 영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초월해 있고, 모두 알 수 없는 영역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나면 우상이 반드시 출연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어떤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 우리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지며,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가 세 가지 채널로 나타났습니다. 마지막 날 궁극적으로 폭발하듯 나타나는 진노가 있습니다. 매 순간 우리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나타나는 진노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내버려두심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니 그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다, 정상적인 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바꿨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며 위반하였다”(26~27절). “더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찮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28절).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진노의 한 모습입니다. 그 자체가 징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마음으로 인하여 온갖 죄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질투, 살인, 다툼, 악독, 분쟁,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역함, 무정함, 무자비 등입니다.     악은 새로운 죄를 계속 만들어내고, 악을 행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불의로 진리를 막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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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0
  • 반드시 결산할 때가 온다 (눅16:1~13)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언젠가는 끝이 있음을 되새겨 준다.   남송 시인 양만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시를 읊었으며, 성경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맡겨 주신 사명을 얼마만큼 잘 감당했는지에 대한 결산을 준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므로 말씀을 통해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길 바란다.   첫째:하지 말아야 할 일(1~3) 청지기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것을 맡아 대신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다. 좋은 예는 요셉으로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창39:4~5)이다. 본문의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함을 주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6~17)말씀처럼 주인은 청지기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다. 시간, 물질, 붙여주신 사람, 믿음의 공동체 등등 작은 일이라 여겨질지라도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해야 할 일(4~9)  앞으로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된 청지기는 변하지 않고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일을 한다.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의 잔꾀를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있다(8절).   이러한 주인의 태도는 돈에 관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재정적으로 얼마를 손해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는 주인의 말이 그 해답이다. 돈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고 끝내는 배신하는 것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시대에 하나님의 청지기로 정말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얻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결산의 기준(10~13)  주인의 결산 기준은 자신의 재산에 얼마만큼의 이익을 더 발생시켰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충성했느냐이다.   칭찬을 받은 다섯이나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들과 달리 책망을 받고 쫓겨난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비유(마25:14~30)에서 보듯이 주인의 칭찬을 받는 것은 맡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충성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느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선택을 요구하신다(13절).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 보다는 얼마나 순종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 것인지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결산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그 결산이 특별한 것은 후회하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결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한 주간 나의 삶이 마지막 결산의 때에 칭찬의 모습이 될지 혹은 책망의 이유가 될지 돌아보며 깨어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간절히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20
  • 잃어버리고 사는 것 (눅15:1~7)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눅15장에서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 한 드라크마,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은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따라서 순위를 매기고, 그 중요성에 따라 사는 어리석은 삶을 회개하며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축원한다.  첫째:긍휼히 여기는 마음(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라는 말씀대로 살지만,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셨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습이 지식은 있고, 말씀도 있지만 그 중심에 긍휼함이 없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손가락질 받고, 미움 받는 일 때문에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을 품기로 결정하셨다. 긍휼함을 잃어버리고 살기 시작하면 마음은 점점 강퍅하여질 수밖에 없다. 긍휼함을 품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만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됨을 명심하자. 둘째:소중히 여기는 마음(3~6)  비유를 통해 집중 할 것은 목자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비유로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3~4)라고 말씀하셨다.   목자는 백 마리가 되어도 양의 이름을 알고, 양은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의 음성을 안다. 그렇기에 한 마리의 양이라 할지라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목자의 마음이다. 소중한 존재들이 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는 함께 해온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어진 관계들임 깨닫고 때론 내게 유익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지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  셋째:하나님 아버지의 마음(7)  의인의 선함은 감동을 주지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진멸당할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라고 간청하고 있다.   바울도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에게 감동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지만 마음은 나의 노력과 결단에 의해 지켜낼 수 있음을 명심하자.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씀하신다.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로 이미 해답을 주셨다. 모든 것을 잃었던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정말 소중한 것을 날마다 힘써 지키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13
  • 제자가 갖추어야 할 것 (눅14:25~3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예수님의 기준으로 무리의 반대말은 개인이 아니라 제자이다.   유대인들이 선민의식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무리의 일원이기에 하나님이 기뻐 받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무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격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애쓰고 노력해야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적극성(25~27)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신5:16)는 명령도 부정할 뿐 아니라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마22:39)는 말씀조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워해야 할 정도의 적극성이 있어야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하만의 계략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에스더 왕비에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4)며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에 결단을 내리는 에스더처럼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 깨달아 알기에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적극성을 지닌 자에게 놀라운 하늘의 축복이 주어지게 된다.  둘째:준비성(28~33)  망대를 짓는 자가 예산을 따져 보고, 전쟁을 앞둔 왕이 군사력을 점검해 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제자로 살기를 바란다면 따져 보고, 점검해서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33절).   40년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다(수5:2~9).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가장 강해져야 할 순간에 자신들이 가장 약해지는 선택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고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약속의 땅을 소유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준비 과정이 된다.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포기라면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생이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셋째:유용성(34~35)  예수님의 기준의 유용성은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받은 은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잘 사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고 권면한다.   참된 제자는 덕이 될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유익이 되어야 한다. 시대가 악하고,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탄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악한 시대에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지 아니면 쓸모가 없어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될지에 대해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35절)로 말씀을 마무리 하셨다. 예수님도 아무리 귀한 교훈이 되고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도 듣고, 깨우치고, 변화되는 자는 많지 않음을 아셨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다”(사26:3)고 약속해 주셨다. 제자는 마음을 정하고 신뢰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자로 평강하도록 지켜주심을 경험하며 사는 자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평안이 말씀을 통해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성도들의 삶에 충만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06-07
  • 소수(少數)의 길을 가라 (눅13:22~30)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수의 주장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열두 명 가운데 단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믿음의 고백을 하고, 엘리야의 시대는 7천의 사람만이 믿음을 지켰으며, 400여명의 다윗의 군사들은 소수였지만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하신다.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소수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힘쓰라(22~2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의 약속으로 구원의 첫 번째 문은 넓고 크지만 점점 작아지는 수많은 문들을 만나게 되고, 궁극적으로 마지막 문 앞에 서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다.   마지막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썩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겨질 것에 대해 힘써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6).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힘쓰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  둘째:떠나라(25~27)  예수님의 주변에 머물며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행위를 행악(27절)이라며 떠나라고 하신다. 마치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에서 보듯이 행악은 저울질하며 사는 것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는 말씀처럼 악한 자의 모습을 떠날 때 소수의 길을 가게 되고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에 대해 떠나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셋째:참여하라(28~30)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으니라”(30절)고 말씀하시만 문제는 처음이냐 나중이냐가 아니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수 도 있기에 참으로 두려운 마음도 든다.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소수의 길을 가는 자는 자기에게 어떤 것도 되돌려 줄 수 없는 이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는 자이며 이런 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의 삶은 물 흘러가듯이 살면 되지만 소수의 삶은 선택에 따른 책임과 대가를 치러내야 한다. 그렇기에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소수가 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막13:13)는 말씀처럼 믿음의 소수로 사는 것은 다수인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만 구원받는 소수의 축복을 믿으며 구원받는 소수가 되길 위해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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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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